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에 귀여운 시츄 한 마리가 들어왔다. 강아지 이름은 촌스러워야 오래 산다는 엄마 아빠의 주장으로 이름은 최고참으로 지어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느낄 새도 없이 물 흐르듯이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우리 고참이 나이가 14살이 되었다. 평소엔 산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고, ‘간식 먹을까’라는 말에 헥헥거리는 모습에 14살이라는 나이는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달쯤 전인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길래 데려간 동물병원에서 신장 수치가 너무 나쁘다는 얘기를 듣고, 입원까지 시켜야 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강아지가 아픈 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힘들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강아지 한 마리가 불러오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온 가족이 고참이 상태만을 바라보고 지냈다. 나는 고참이와 보내는 시간이라도 늘려보려고 혜화와 분당에서 통학을 했다. 매일 새벽 6시에 나서 광역버스를 타는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서야 함께하는 시간이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강아지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냐며 물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일이 되니까 못할 게 없었다. 오죽하면 내 일상에 불행이 닥칠 때면 기분이 좋았다. 고참이한테 그만큼의 행운이 대신 갈까 싶어서 말이다.
신기한 일이 또 있었다. 둘째 강아지인 신참이가, 고참이가 없으니 기운이 쭉 빠져서는 평소와 영 달랐다는 것이다. 강아지들도 그 빈자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안쓰러웠다.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감정은 생각보다 더 많이 잔인했다. 고등학생 때, 수시를 모두 떨어져서 너무 힘들었을 때에도, 부모님과 싸우고 펑펑 울던 날에도 아무말 없이 품에 안겨서 내 편이 되어준 우리 고참이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다행히도 고참이는 지금 열심히 회복하고 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물 한 모금조차도 거부해서 주사기로 입에 넣어줘야 했지만 이제는 자기 힘으로 물을 마시게 됐다. 여전히 밥은 안 먹지만, 공을 보여주면 신나서 잡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한다. 집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마중이라도 나와주는 날엔 동영상을 찍을 만큼 온가족이 신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마라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아하던 아이가 고구마를 입에 넣어줘도 삼키지도 않는다. 이런 모습에 이제 진짜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고 싶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다.
익숙함에 빠져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그 흔한 클리셰가 이토록 와닿은 적이 있을까? 그래도 이번에 이렇게 잘 이겨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줄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 말이다. 매일매일 분당에서 혜화까지 가는 일이 조금도 번거롭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문득 다른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보았다. 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 소중한 것들에 충분히 잘하고 있나? 말그대로 ‘익숙함에 속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갑자기 부모님이, 형제자매가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고참이가 입원한 사실만으로도 손에 일이 안 잡히는 시간들을 보냈는데 부모님이 아프시면 그냥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앞설 것 같았다.
새삼스럽지만 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다. 너무 뻔해서 한 귀로 흘리기 일쑤겠지만,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들에게 소중함을 충분히 표현해주기를 바란다. 소중함과 사랑함은 몇 번을 표현해도 모자라기에, 될 수 있는대로, 시간나는대로 충분히 표현해주기를 바란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