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이별

  • 등록 2026.03.25 15: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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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주 칼럼

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언제 따뜻한 봄이 올까 생각했지만 3월 5일은 24절기 중 세 번째인 경칩이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초봄의 시작 기준이 되는 절기로 알려져 있다. 우수와 춘분 사이에 들어 있는 경칩은 글자 그대로 땅속에 들어가서 동면을 하던 동물들이 깨어나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무렵이 된다. 만물이 약동하며 새로운 생명이 생기며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속에서 깨어난다는 뜻으로 한국에선 그중에서도 개구리가 유난히 강조된다.

 

물론 한기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겨울이 물러가 완연한 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춘분은 지나야 한다. 경칩부터 춘분 전까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한파가 사라진 시점인 것은 맞지만, 꽃샘추위가 찾아와 쌀쌀한 날씨를 보이기 때문에 간혹 “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도 얼어 죽겠다”라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꽃샘추위의 경우 한겨울 한파처럼 기온이 급강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추위 전에는 포근했다가 갑자기 추워져서 기온 차이가 심해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체감상 느껴지는 추위가 더 세다. 이러면서 날씨가 따뜻해져 초목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찬바람으로 시작된 겨울도 이제 봄바람으로 마무리돼 가고 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생체 시계는 이 순간에도 빠르게 흐르고 있다. 나이가 들고 노화를 겪으면서 단순한 감기도 회복하는데 오래 걸린다. 예전 상태로 100% 회복되지 않고 여러 후유증과 합병증을 겪으면서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La Mort)’에서 죽음을 하나의 단일한 개념이나 생물학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인칭(人稱)’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현상으로 분석한다. 죽음의 관점에 1인칭, 2인칭, 3인칭이라는 구분은 존재론적·윤리적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3인칭의 죽음’은 뉴스에서 매일 접하는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다. 나와 관계가 없는 타인의 죽음을 뜻하며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 쉽게 흘려보낸다. 탄식이나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된 죽음이 아니기에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2인칭의 죽음’은 나와 가까운 주변 인물들의 죽음이다. 긴밀한 관계를 맺은 부모나 형제의 죽음으로 가장 큰 슬픔과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1인칭의 죽음’은 본인의 죽음으로 가장 개인적이며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겪게 되는 사건이다. ‘언젠가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확실하나 이 죽음은 내가 결코 미리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1인칭 죽음은 삶 속에서 단 한 번, 직접 겪을 수 있지만, 그 순간에는 인지할 수 없는 개념적인 죽음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성공의 정점에 있던 판사 이반 일리치는 법관으로서 성실했고, 사회적 성공을 추구했고, 체면과 안정을 중시했다. 그는 죽음을 노년이나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로 생각한다. 죽음은 본인에게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던 이반이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동료 판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인사이동과 승진 문제를 먼저 계산한다. 누가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이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나 불편을 가져올 것인가를 따진다. 동료들에게는 이반의 죽음은 처음부터 완전히 3인칭의 죽음이 된다. 법대 동창으로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표트로는 2인칭의 죽음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진지한 감정을 가진다. 그러나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이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카드 게임을 하러 지인의 집으로 향한다. 2인칭의 죽음으로 인식했지만 3인칭의 시점으로 돌아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반의 죽음이라는 큰 명제 앞에 결국 3인층의 관점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민낯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얼마 전, 정확히는 2월 13일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95세의 연세로 경도의 인지 장애와 청력이 나쁘셔서 불편해하셨지만, 거동은 잘하셨다. 한 달 전 넘어지시면서 고관절 부위의 골절로 입원하시게 되었고 예후를 보면서 어떤 치료를 할지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급격히 몸이 쇠약해지시면서 새벽에 병원에서 소천하셨다. 연세가 있으셔서 언젠가는 돌아가시리라 생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니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어설픈 이별을 맞게 되었다. 아쉽게도 임종을 못 뵈었는데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면 장모님이 어떤 얘기를 해 주셨을지 궁금해진다. 외동딸인 집사람을 사랑한 만큼 필자도 친자식같이 사랑을 주셨던 장모님과의 추억과 기억에 장례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오는 상실과 슬픔을 단기간에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 2인칭의 죽음을 경험하며 나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와 같은 1인칭의 죽음을 생각하였다. 장모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지만 살아 있는 가족들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2인칭에서 1인칭에서, 다시 3인칭의 죽음으로 인식하면서 어설픈 이별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오곤 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잠시 숙연해질 수는 있어도, 곧 일상으로 돌아가고 아무리 가까운 관계였어도 죽음은 늘 남의 일로 남는다.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의 ‘유언 노트’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선물은 삶의 우선순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누구와 어떻게 연결돼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제공한다. 삶이 끝날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 진지하게 삶을 고민하고 더욱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라며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유언을 쓴다. 그때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현재 나의 위치를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속 나아갈 힘을 얻는다. 유언은 내게 삶을 향한 다짐이다.”라며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상상하고 준비하라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죽음 준비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을 계획하는 방법,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기술들을 얘기한다.


늘 곁에 있을 것 같고 즐거운 추억이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생명의 탄생은 예측하고 손꼽아 기다릴 수 있지만, 생의 마지막은 알 수 없으며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으로 타인의 죽음이 그렇고 나 자신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과 스쳐 지나가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우리에겐 죽음이란 언제나 낯설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단어이다. 죽음을 기억해야 오늘 삶이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당황하고 두려워진다.


장자는 ‘자기 삶을 잘 사는 일이 곧 자기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잘 살기 위해 죽음을 통해 배워야 하지만 내 인생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쓰고 정리하고 계획하는 일은 아직도 어설프고 쉽지 않은 것 같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황충주 연세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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