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
아기는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넘어간다. 이 때 아버지가 출현한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라도 상관없다. 아버지는 곧 ‘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아기가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면서 ‘균열(die Spaltung)’이 생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이름이 주체를 결정한다.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소녀는 중년 남자에게 “Who you are?”라고 물어본다. 그의 정체성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여자인 소녀는 ‘h’ 발음이 안 되고, 그래서 이 물음은 “Ou you are?”가 되어버린다. ‘ou’은 프랑스어로 ‘where’를 뜻한다. 즉 “누가?”라는 물음이 “어디에서?”라는 물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름은 곧 ‘어디’에서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나타난다. 즉 어머니에게는 남근(phallus)가 결핍되어 있다. 이 때의 남근은 생리학적인 남근이 아니라 아버지의 상징, 법의 상징, 상징계의 상징이다.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이 팔루스이다. 아기는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즉 자신을 팔루스에 동일화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어머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nom)/기표는 곧 아버지의 안돼(non)이다. 즉 아버지/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하다. 무엇의 금지인가?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그것은 곧 연속성에 대한 갈망을 불연속으로 떼어놓는 과정이다. 바로 그런 분리함(s parer)이 있어야 자신이 준비되는(se parere) 것이다.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아버지/법은 제재를 가하게 되며, 이 때문에 아기는 ‘거세(castration)’ 공포를 느낀다.(여자아이의 경우는?)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자아의 이상"을 가지게 된다. 즉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주체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상징계에 자리를 잡은 주체이지 상식적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니다.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를 ‘원억압(原抑壓)’이라 부른다. 이 억압은 의식적 억압과 구분된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불러일으킨다.(이 욕구불만도 의식 차원에서의 욕구불만과는 구분된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일치’라 하는 것이 나을 듯이 보이는) ‘부정(negation)’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렇게 도덕과 윤리는 균열, 틈, 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즉 상징계에 대한 ‘거부’로부터 발생한다. 여성이 잘 걸리는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남성에게서 잘 발견되는 강박증은 반대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에, 즉 스스로를 계속 팔루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병들에 대한 치료는 기본적으로 상징계에로의 정상적인 진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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