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의 파노라마Ⅲ
맑시즘은 20세기 철학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파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으며, 이후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 전통은 오늘날 네그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맑시즘을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었다. 중국에서는 마오처퉁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등등이 잇달아 성립됐다.
프랑스의 경우 PCF(프랑스공산당)가 성립했으며 이 기관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뚜렷이 대조되는 두 종류의 맑시즘이 전개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대변되는 ‘실존적 맑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알튀세에 의해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맑시즘"이다. 전자가 맑스를 헤겔과 연계시켜 (교조적 맑시즘에 결여되어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변증법적 성찰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맑스를 헤겔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후기 맑스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에 초점을 맞춘다.
알튀세의 저작들에는 다음이 있다: 『자본』을 읽다』(I·II, 공저, 1965), 『맑스를 위하여』(1967), 『레닌과 철학』(1969), 『입장』(1976). 『자본』의 연구에는 마셰리, 발리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알튀세 학파"를 이루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는 실존적 맑시즘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비판하고 맑스를 ‘과학적으로" 읽기를 원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사상계의 두 가지 주요 성과, 즉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 및 바슐라르-깡길렘의 인식론을 맑시즘과 접맥시키고자 했다.
알튀세는 맑시즘 연구에서 당대까지 결여되어 있던 인식론(과학철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곧 맑시즘을 메타과학적으로 재정초하려는 야심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맑시즘 "철학"과 실제 ‘정치"를 이으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는 특히 ‘이론(theory)"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행했다.
알튀세에게 ‘이론"이란 언제나 ‘이론적 실천"이다. 그에게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의 특수한 한 양상이다. 이론은 이론적 실천인 것이다. 후에 (알튀세의 영향을 받은) 푸코가 ‘담론"을 그 자체 하나의 실천으로 보았듯이, 알튀세는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레닌의 생각을 발전시킨다. 혁명 주체가 ‘자연 발생적" 단계에서 ‘의식화된" 단계에로 이행하는데 이론적 실천은 필수적인 것이다.
알튀세에게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다(훗날 푸코, 들뢰즈 등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됨). 이데올로기는 ‘전(前)과학적 이론"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의 집합"이다. 즉 맑스가 말하는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산물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이 하부구조(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성립한다. 그 점에서 일종의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계급의식이 결여된, 사적 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이 결여된 이전의 사상·철학들은 이런 역할을 해 왔다.
이데올로기 즉 일종의 ‘허위의식"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자아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무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주체요 중심으로 착각하는 것을 ‘오인(meconnaissance)"이라고 했다. 인간은 상징계가 자신의 무의식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상징계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요, 법이다. 라캉에게서 은유적 뉘앙스가 강한 이 개념들이 알튀세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사회 전체가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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