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고전 시대의 담론들은 세계의 아프리오리한(경험과는 독립적인) 질서를 상정하고서 모든 구체적 사실들을 그 틀에 맞추려 했다.
그러나 19세기의 실증주의가 도래하면서 ‘사실’이 궁극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
10장은 구조주의를 다루고 있으며, 주체철학의 죽음, ‘선험적 주체’의 죽음을 논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부제인 ‘인간과학의 고고학’을 처음에는 ‘구조주의의 고고학’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은 결국 구조주의에 대한 메타적 정초의 성격을 띤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를 통해서 이제 근대적 주체의 죽음이 발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환상을 해체시켰고, 라캉은 순수 자아라는 환상을 해체시켰다. 알튀세의 사유 역시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해체시켰다.
푸코는 이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바닷가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어가듯 인간의 얼굴도 지워지리라.”
<1202호에 계속>
고전주의 시대에 일반문법의 기능은 (담론의 단순한 그리고 매우 섬세한 선 속에서 드러남으로써, 동시성의 제형태를 가정하는) 하나의 언어가 어떻게 표상의 계기적 연쇄고리 속으로 도입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19세기 이래로 발전한 인간의 존재양태에 대한 분석은 표상 이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분석의 임무는 반대로 사물들 일반이 어떻게 표상에 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즉 사물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또 어떤 토대 위에서 그리고 어떤 한계 내에서 지각의 다양한 양태보다도 더 깊은 실증성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말과 사물’
이 주름[인간이라는 이중체] 속에서 철학은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독단론이라는 잠이 아닌 인간학이라는 잠에 빠진 것이다. [...] 아직도 인간에 대해서, 그의 지배나 혹은 그의 해방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모든 인식을 인간 자신의 진리들에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간학화하지 않고서는 말하고자 하지 않는 또 탈신비화하지 않고서는 신비화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사유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좌파적인 그리고 좌경화된 반성의 형태들[비웃는 의미임]에게, 우리는 철학적 웃음 ― 어느 정도는 침묵하는 ― 으로밖에는 응답할 길이 없다. ‘말과 사물’
분명한 것은 인간과학들의 이러한 속성을 명백히 해 주는 것이 인간이라는 저 특권적이며 특이하게 얽혀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을 구성하는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의 특이한 영역을 제공해 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들을 요청하며 그들을 수립하는 ―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인간을 그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는 ― 것은 에피스테메의 일반적인 배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학’은 인간이 무제시되는 어느 곳에서나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의식에 고유한 차원 속에서, 의식에게 그의 형태들과 내용들의 조건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규범들, 규칙들,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집합들을 분석하는 그곳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말과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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