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하루도 바닥에 등을 대고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 하루 한끼만의 식사, 그리고 철저한 계행의 삶을 실천하며 이 시대의 살아계신 부처님으로 숭앙되던 선지식 청화 스님께서 11월 12일에 입적(入寂)하셨다.
영결식날에 스님의 법구(法柩)가 성륜사 조선당에서 나오자 구름같이 몰려있던 불자들은 동시에 ‘아! 스님..." 목이 메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평생동안 손수 빨래를 하고, “내가 입적 후에는 거적에 말아 일반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사리수습도 하지 말라"라는 스님의 정신을 받들어 법구는 아무런 꽃장식 없이 평소 스님이 수하던(입던) 가사 한 벌만이 덮여진 채였다.
또한 스님의 법구가 다비 ‘茶毘; 화장(火葬)’될 연화대는 평소 청빈과 겸손으로 일관한 스님의 가풍에 따라 일절 치장하지 않고 흰 천으로 덮여 있었고, 만장도 사절했다. 사리도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란다.
최근에 많은 고승들이 열반하셨고, 세간에서는 사리(舍利)에 대한 관심이 높다.
사리는 범어(梵語)의 ‘Sarira"의 음역으로, 원래의 뜻은 ‘신체(身體)"인데 사리는 셋으로 구분돼. 불타의 유골은 진신(眞身)사리 또는 육신(肉身)사리, 불타의 정신이 깃든 불경(佛經)은 법신(法身)사리, 고승(高僧)의 유골은 승(僧)사리라 한다.
최근에는 참된 불도 수행의 결과로 생긴다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지칭하기도 한다.
석가 열반 후, 다비해 나온 유골인 사리는 주변 여덟 나라에 나눠 각각 이것을 봉안하기 위한 불탑(佛塔)이 세워졌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사리를 처음 모셔온 것은 진흥왕 10년(서기 549년)이고,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에 자장(慈藏)법사가 부두골(佛頭骨), 불아(佛牙), 불사리 100알과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가사 1벌을 가져와 셋으로 나눠 하나는 황룡사 탑, 하나는 태화탑, 또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두었다.
이 중 통도사의 치아사리를 일본에서 훔쳐간 것을 사명당이 다시 찾아와 금강산 건봉사에 안치했고, 제주도 고관사에서도 치아사리가 발견된 바 있다.
스리랑카에는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셔놓은 불치사(佛齒寺)가 있다.
청화 스님의 임종게(臨終偈)는 “이 세상 저 세상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此世他世間 去來不相關 蒙恩大千界 報恩恨細澗)”이다.
앞의 두 구절은 생사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스님의 경계를, 뒤의 두 구절은 스님의 겸손한 가풍을 잘 드러낸 것이다.
아니 뒤의 두 구절은 온갖 혜택을 받고 살면서도 고마움과 은혜 갚음을 모르는 중생들에 대한 경책이다.
우리는 이적(異跡)과 신통(神通)함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물질인 육신사리에 호기심을 갖기 보다는, 고승들의 지혜와 자비 정신(법신사리)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