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과 음력이 있어서일까?
마치 예행연습처럼 양력 1월 1일로 새해맞이를 한 번 요란하게 치루고, 이제 조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음력설을 맞았다.
연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학기를 맞는 학생들처럼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이 때 범부는 물질을 소원하지만, 성인은 마음을 닦아 무아(無我)를 성취코자 한다. 수행자 역시 성인을 좇는 사람들이라 마음을 닦고자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놈을 대체 어떻게 닦을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거대한 학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라는 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해 학년이 오르고, 결국에는 졸업해야 하는 학생들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배우고 습득해야하는 공부재료들이다. 특히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은 위대한 스승이자 공부재료이다.
어떤 이가 죽어 지옥에 가자 저승사자가 물었다.
왜 하필 지옥에 왔소??
그가 대답했다.
“아무도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아 이곳에 왔소이다.”
“아니, 당신은 당신 주변의 수많은 죽음을 보지도 못했단 말이오? 죽음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단 말이오?”
하면서 저승사자가 혀를 찼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을 것이다. 무수한 죽음을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 이 무지와 어리석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마디로 나고 죽는 이유를 모르는 데서 온다. 즉, 나고 죽는 일이 한 생명의 정신적 진화를 위한 반복되는 과정임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고 죽는 이치를 모르면 당연히 하루하루 사는 의미 또한 모를 것이요, 그러다 일생을 한나절처럼 마칠 것이니 어찌 허탈하지 않겠는가.
어릴 적 소풍가기 전날 밤을 기억할 것이다. 이날은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어제 입력된 대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반면 시험 전날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역시 입력된 대로 걱정과 두려운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즉, 전날의 과(果)가 오늘의 인(因)이 되고, 오늘의 인이 다시 내일의 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끝없이 돌고 도는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을 알고자하면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내생을 알고자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티베트의 속담처럼 내생이 내일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루가 주어진다면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 보라. 오늘 내가 할 일이 진정 무엇인가. 육신의 건강에 투자하는 만큼 마음 또한 보살피며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내 마음이 조금씩이라도 발전해간다면 하루해를 넘기고도 아쉽지 않을 것이고, 한 생을 마무리 짓고 긴 잠자리에 누울 때 역시 편안하고 흐뭇할 것이다. 일생동안 공부하느라 입었던 낡은 교복, 즉 육신을 벗어버리고 좋은 성적표를 들고 떠나니 어찌 홀가분하지 않고 기쁘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주위의 무수한 죽음은 우리의 스승들이다.
그 스승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부질없는 일 그만두라고.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마음의 진화를 위한 것이며, 탐내는 마음·성내는 마음·어리석은 마음을 녹이고 녹여 완전히 없애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 만나고 저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느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그것이 순간순간 숨쉬고 끼니마다 밥 찾아먹는 이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