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삶-한마음선원 주지 혜원 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좋고 싫은 것 모두 내려놓을 줄 알아야

  • 등록 2004.02.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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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이다. 누가 찾아 왔다는 연락을 받고 사무처에 내려가 보니 처음 보는 듯한 보살(절에서는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한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온 연유를 물으니 보살은 먼저 선물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야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꽤 오래 전에 본인으로서는 어려운 부탁을 했는데, 내가 선뜻 들어주어 여간 고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되새기다가 이제야 시간이 나서 왔다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듣고 보니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소임 상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그 때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기는커녕 그 보살 얼굴조차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러나 없었던 일을 갖고 고맙다고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아무튼 나는 감사히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상처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 아닌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보살처럼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아무 날 아무 시에 당신이 내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두고두고 되새기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 왔노라, 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언제 그랬냐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억울해 하지 않을까.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문제는 더욱 엉킬 것이며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을까.
감사하다고 선물을 들고 찾아왔을 때처럼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면 어떨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없었던 일을 갖고 따지러 왔을 리는 없을 테니, 무조건 사과한다면 상대의 마음도 쉽게 풀리리라.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독화살을 맞았을 때, 이 독화살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독이 묻었는지, 누가 쏘았는지를 따진다고.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독화살을 쑥 잡아 뽑는다고.


이 때 독화살을 뽑는다는 것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독화살이 내 살을 뚫고 들어왔으니 우선 쑥 잡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단지 상황을 무마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독화살을 만든 이유, 독화살을 쏜 이유까지도 함께 인정한다는 뜻이다.


비록 나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렇다면 그것은 곧 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원의 큰스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닥쳐오는 일체의 경계(고난 혹은 번뇌)는 실은 과거에 내가 지어 숙명통이라는 컴퓨터에 입력해 놓은 것이라고.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은 것이 인연에 따라 컴퓨터에서 출력되듯 솔솔 풀려나오는 것이라고.
따라서 좋은 경계가 오면 감사한 일이구나 하고 놓고, 나쁜 경계가 오면 마음으로 돌려서 잘 되라고 놓아야 한다고.


이렇듯 일체 경계가 내 탓인 줄 안다면 억울해 할 일이 없다. 얼굴을 붉힐 일도, 목소리를 높일 일도 없다. 오히려 나를 진화시키기 위한 공부재료인 줄 알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좋은 것이라고 붙잡고, 싫은 것이라고 떨쳐내려는 마음으로는 한 발도 내디딜 수가 없다. 그 붙잡고 떨쳐내려는 마음이 선악의 인연을 짓기 때문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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