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면서, 일제는 한국주차군의 사령부를 용산에 두고 전국 주요 도시와 요새를 완전 장악해 갔다. 그리해 1905년 10월경에는 2개 사단 약 2만명 병력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이 시기인 1905년 9월 일제의 한국주차군 사령부에 촉탁 치과의사가 최초로 배치되기도 했다.
1905년 9월 일본 육군의 한국주차군 사령부에 촉탁 치과의사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오전에는 병사 20명 내외를, 오후에는 사령관·참모장·각 부대장·장교를 진료했다. 어느 날은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가공치(架工齒)도 만들었고, 각국 주재 공사들과 한국 대관들을 치료하는 등 매우 분주했다. 1906년에 사임한 그는 그해 6월 서울 남산(남산, 현 회현동 3가)에서 개업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시메우찌 켄세키(注連內堅石)가 왔는데, 그 또한 1909년 사임하고 개업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병원을 매입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한성병원이 그러한 경우이다. 한성병원은 1895년에 일본인 세와기 히사오(瀨脇壽雄)가 설립했던 것을 1897년 6월 일본 해군에서 매입해 운영했다. 이 병원은 1904년 경성 일본인 단에 이관되면서 단립(團立) 한성병원으로 개편됐다. 이때 치과부도 외과 소속으로서 설치돼 있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병원 치과이다. 초대 치과 책임자는 시게시로 야스지(重城養二)였다. 그는 외과 과장의 지도와 감독 아래 진료를 담당했다.
그 후 한성병원은 공립 종합병원으로 운영되면서 치과부장으로 치과의사 이이쓰까 데쓰(飯塚徹)가 왔다. 1905년 그는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07년 2월 서울에 다시 와서 치과의원을 개원했다. 이이쓰까 데쓰(飯塚徹)는 순종황제(純宗皇帝)의 치과 질환을 치료했다. 순종실록(純宗實錄)에 의하면, 순종은 1910년 12월 7일에 치과 치료를 받았는데 이이쓰까 데쓰(飯塚徹)가 맡았던 것 같다. 1910년 한성병원 치과부에 부임한 사람은 와다나베 마사카츠(渡邊正亮)였다.
일본인 단체에서 설립한 병원도 있었다. 동인회 산하 용산 동인의원에는 외과 소속으로 치과부가 있었다. 그 초대 치과 담당자는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였다. 1910년 전후의 치과 담당자는 비상근이던 시메우찌 켄세키(注連內堅石)였고, 이 때에는 그의 감독 아래 무자격자이던 사노 후미오(佐野史郞)이 진료했다.
일본 국내에 제국주의자의 전위 단체 동아동문공사(東亞同文公司)의 동조 단체인 동아동문의회(東亞同文醫會)가 있었다. 이 단체가 아세아의회(亞細亞醫會)라 하다가 동인회(同仁會)로 명칭을 변경했다. 중국 및 기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의학·약학, 그리고 여기에 부수되는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 제국(諸國) 서민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병고를 구제해 우의를 돈독히 하고, 나아가 이들 나라의 문화에 공헌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그것은 침략의 구실이었다.
일본인 여자가 치과 병원을 개업한 경우도 있었다. 1909년에 나까무라 야스코(中村安子)가 그였다. 그는 미국 펜실바니아 치과대학을 졸업한 여자 치과의사였다.
대한의원에도 치과가 설치됐다. 1909년 11월 30일 종합병원인 대한의원에 한 개의 과로 치과를 설치한 것이었다. 대한의원의 분과 규정에 따라 내과, 외과, 안과, 산과, 부인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피부과, 치과, 약제과, 서무과를 두도록 했다. 대한의원은 의학교 및 부속병원, 광제원, 대한적십자사 병원을 통합해 설립한 병원이었다.
※ 출처: 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 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