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삶-한마음선원 주지 혜원 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참는다는 생각과 상대조차 없어야

  • 등록 2004.08.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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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특히 설법을 잘해 설법제일(說法第一)로 일컬어졌다.
설법할 때, 그는 먼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 다음, 정곡을 찌르는 고언(苦言)으로 가책을 느끼게 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공(空)함을 일깨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그 부루나 존자가 포악하기로 소문난 수나아파란타 국(國) 사람들을 제도하러 가고자 부처님께 허락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허락하기에 앞서 몇 가지 물어보셨다.


“그곳 사람들은 사납고 거칠다던데 네 말을 듣고 비방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비방만 하고 때리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 존자가 대답했다.
“주먹으로 때리고 돌을 던지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칼로 찌르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칼로 찌른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죽이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죽인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설사 저를 죽인다 해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저희가 수없이 나고 죽고 나고 죽는 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그때그때 받은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깨부수어 ‘참나’가 드러나게 해 준다면 그야말로 어질고 착한 보살의 행원이 아니겠습니까.”


“부루나야, 네가 정녕 수나아파란타 국의 중생들을 제도할 자격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부루나 존자는 수나아파란타 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와 같이 나를 욕하는 사람도 부처님이요, 나를 때리는 사람도 부처님이요, 나를 해치려는 사람도 부처님으로 본다면 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인욕(忍辱)바라밀’이라고 한다. 즉, 인욕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참는다는 생각’ 조차, ‘참아야 할 상대’ 조차 없는 것을 말한다. 상대가 누구건, 어떻게 나오건 오직 부처님의 나툼으로 볼 뿐이다. 참아야지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언제인가는 다시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상대를 탓하고 경계를 탓한다. 동업자를 잘못 만나 일이 안 된다느니, 거래처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느니, 끊임없이 원망하고 분노한다. 이와 같은 원망과 분노는 또 다른 원망과 분노를 낳을 뿐 문제 해결의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먼저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있기에 상대가 있고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나다’, ‘내가 했다’, ‘내가 잘났다’ 하는 ‘나’라는 마음이 있어 내 탓임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이 ‘나’라는 것을 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나를 놓고 놓고 또 놓다보면 원망과 분노 또한 놓아질 것이며, 경계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무능한 동업자도 부처님이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래처도 부처님이라는 것을,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동업자와 거래처의 모습으로 나투었을 뿐이라는 것을.


부루나 존자가 아무리 설법을 잘한다고 해도 이와 같은 인욕바라밀이 돼 있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결코 수나아파란타 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스스로 제도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상대를 제도할 수 있겠는가. 부루나 존자가 설법제일이라 일컬어진 것은 단지 언변만 능해서가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수행력도 함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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