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한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치과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1915년 11월 1일 쉐프리(William J. Scheifley)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부임하여 치과학교실을 신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규 교수과목으로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강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치과병리, 치과질환, 발치법 등으로 최상급 학년에게 주 1시간 강의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적부에 있는 1917년도 4학년 학생들의 치의학 성적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쉐프리는 치과 치료실에서 보존, 보철 및 구강외과를 일반 외래환자에게 시술할 때, 학생들에게 임상실습으로 교대로 치과치료실에서 견학하게 했다. 그는 첫해 819명의 유료환자를 치료했고, 95명의 무료환자를 돌보았다.
쉐프리는 “한국인은 치과 치료에 경제적 능력이 없고, 치아 및 구강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치의학와 치과의사가 전문 분야라는 인식의 결여되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쉐프리는 한국인에게 계몽할 내용을 제시했다. 첫째, 식생활 습관이 구강조직에 영향을 준다. 둘째, 치아의 맹출 통계표를 작성한다. 셋째, 환경과 습관에 의한 치궁의 기형을 연구한다. 넷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가르치는 일에 한계를 정한다는 것이었다.
쉐프리는 치과대학이 없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안에서 치의학 교육을 했다. 그는 일반의를 찾아오는 치과환자에 대한 일반적인 치료법에 관해 발표하면서 치의학을 의학의 한 분야일 때 다양한 의학 교수진은 자기의 전공분야에서 학생들을 철저히 교육하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의학도들은 치의학과 친근하게 되고, 치의학이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질 것이라 했다.
치과는 치과전문의가 되어야 하며, 치과전문의 교육은 기공과 임상에 중점이 주어졌다. 임상과 기공을 위한 재료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것은 졸업후과정에서 더 배워야 할 것이었다. 치과 환자들이 오직 고통과 불편함이라면, 일반 의사가 발치, 소독, 청결을 행하는 일에 불과한 뿐일 것이다. 이러한 일만으로는 전문 분야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쉐프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우선 교육자의 보조자를 구해야 했다. 동정심과 교육받은 계층들의 지지와 다양한 교육기관의 지도자가 있어야 했다.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할 때 교직원 명단에 쉐프리는 치과학교수로 되어 있고, 1917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에 쉐프리가 주임이었고 최주현(崔周鉉) 이 H.C.가 돕고 있었다. 1919년 일본인 미시나 케이키치(三品敬吉)는 조수로서 쉐프리를 도왔다. 그는 미국에서 수학한 일본인 치과의사였다.
1917년 쉐프리는 2년간 조수 역할을 한 의사에게 증서를 주었다. 그러나 그 증서는 일제의 치과의사자격 부여 조건에는 합당하지 않았고, 수련 받은 의사 역시 치과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쉐프리의 치과의사 양성계획안은 무산되었다.
쉐프리는 일의 계획과 언어공부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토,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3시부터 5시까지의 2시간 동안 이 일을 했다. 이는 몇 일 동안에 될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어떤 보철물은 완성되지 못하거나 임시로 제작되기도 했다.
쉐프리는 치과 홍보와 서울에 체류할 사람이 지내는 방법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 모든 것 중에서 하나의 뛰어난 것은 지도자의 정신으로 일에서 우리의 실제 목표가 무엇인지 시각을 잃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인도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라 했다.
1921년 3월 쉐프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의 교직과 선교치과의사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20년에 미북장로교회 선교사직을 사직했고, 1921년 3월 후임 미국인 치과선교의사 부츠(J. L. Boots)가 내한하자 인계하고 귀국했다. 그는 일생을 펜실베니아 하리스버그에서 치과의사로 봉사하다 1958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