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6호에 이어 계속>
1930년 9월 건축이 시작돼 1931년 10월 27일 완공했다. 1931년 10월 28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예배당(현 남대문교회)에서 낙성식이 거행됐다. 3층인 이 건물은 최신식 장비와 기구를 갖춘 종합 치과병원 수준이었다. 건물이 준공돼 독일 릿터 회사 제품의 최신 치과 치료대 10대와 미국 에스 에스 화이트 회사의 각종 기구가 들어 왔다.
건물이 신축돼 치과가 확장되므로 27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설비와 기술 등이 우수하게 갖추게 됐고, 치과 수입은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됐다. 수익의 1/3은 치과시설자금으로, 1/3은 치과준비금으로 적립하고, 1/3은 치과의사양성에 쓰기로 했다.
부츠는 한국인의 구강위생을 위해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구강위생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치과의사수는 증가하고 기술도 진보됐으나 충치환자는 늘어나는 실정이었다, 아직도 “앞니에 금장치를 해달라”고 오는 환자가 있을 정도였다. 올바른 구강위생에 대한 인식을 위해, 부적당한 보철물 장착으로 야기된 질환에 대한 예방과 치료를 위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부츠는 치과의사에게 구강위생에 최선을 다하자고 협력을 구하면서 치과의사들이 나서자고 했다. 치의학적 기초를 퇴보시키고, 의사들의 협조를 저하시키며, 치과의사들의 위상을 스스로 낮추는 영리적인 목적을 떠나자고 했다. 그는 신문, 잡지, 방송, 학교의 교육 등을 이용해서 구강위생을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츠는 학술 면에서도 크게 공헌했다. 그가 쓴 ‘한국인의 음식과 구강상태; Diet and Dental Conditions in the Korean’이 논문은 1927년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 발표되고 노스웨스턴대학 회보에 게재되고, 1930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연구소에 속한 각과 연구발표회와 오사카의 일본의과치과학회에서 발표됐다. 이것은 한국인의 구강질병 발생양식을 통찰한 논문이다.
‘한국의 치의학의 발전; The Progress of Dentistry in Korea’ 이 논문은 1934년 경성치과의학회에서 한 특별강연이었다. ‘2세기의 중국 낙랑인의 두골; A Chinese Nak Nang Skull of the AD 2C.’이 논문은 1935년 Journal of Academy of Dental Association에 발표한 것으로 의사학에 관한 학술적인 내용의 것이다.
‘나방과 나비; Caterpillars and Butterflies’ 이 글은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글로서 종교적으로 선교사의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츠는 ‘치과센터’를 설립하고 치과를 운영했으며 한국인의 구강위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부츠가 선교지를 옮겨 중국 북경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근가게 됐다. 그 후 1943년 북경에서 미국으로 돌아가 치과의료에 종사했다. 세브란스 병원의 치과진료는 맥안리스가 인계를 받아 1940년 강제 송환될 때까지 일을 했다. 1941년 이유경이 책임자가 돼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한국인 치과의사에 의해 운영되게 됐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 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