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의대나 치대는 나의 진로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했다. TV에서 피가 흥건한 수술 장면이라도 나올라 치면 이내 고개를 돌리곤 했으니까.그런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치과대학까지 오게 됐다.
철원에서의 군 생활은 사람을 변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군대에서의 경험은 나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6년 여름에 철책근무가 한창일 때, 철원에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다. 그러던 며칠 뒤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우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병사 두 명이 산사태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가 근무를 서던 초소가 산사태에 휩쓸려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명확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삶에 집착해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마음 한번 고쳐먹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이전에는 공포와 불안 때문에 들리지 않던 내 주변의 새소리, 짐승 울음소리, 물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변은 변한 것이 없는 데 내 마음이 변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떤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또한 이전의 “피=공포와 두려움” 이라는 고정관념에 벗어나 “피=피”라고 볼 수 있었고,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 말년 때의 일이다. 그 해에는 봄이 늦게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3월이 다 지나도록 산과 대지는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막사 앞의 나무와 꽃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 4월초쯤인가...... 드디어 꽃망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꽃나무는 탐스런 노란 꽃을 피웠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꽃나무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내겐 큰 기쁨이었다. 처음에는 빨리 제대하고 싶어서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막상 봄이 오는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자연의 신비로움이 푹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자연인가?
제대 후 복학했을 때 나는 입대 전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3학년을 마쳐갈 무렵에 나는 생물학이라는 전공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쪼개고 나눠서 생명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을까? 오히려 생태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 같았다. 이때부터 즐겨 읽은 책이 도덕경과 장자, 그리고 에픽테투스이다. 4학년이 되어 진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선배를 통해 치대를 알게 되었고, 결국 치대로의 복수 전공을 결정했다. 당시에는 치대에 대해서도, 치과의사란 직업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막상 치과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치과의사란 직업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많아진다. 그리고 나의 생각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나와 자연 그리고 세상에 대해 묵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직접 세상에 뛰어들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기술을 베푸는 것도 커다란 행복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나는 치과의사가 되면 어떤 일은 하고, 또 어떤 일은 하지 않으며, 어떠한 치과의사가 되겠습니다.” 라고 단정지어 이분법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다. 내 생각엔 그런 다짐이 그리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다만, 어떤 일이든 순리와 흐름에 따라 거슬림 없이 처리하고 싶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아래 글처럼......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혔습니다. 그 사람이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당장 소리 높여 비켜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사람들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나는 그리 크지도 번화하지도 않은 조용한 곳에서 자리를 잡아, 마치 그곳 사람들의 주치의인냥 살고 싶다. 인근 주민의 가족관계는 물론 작은 행사까지도 속속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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