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필자는 종합 신체검사를 받아보았다. 한 나절 동안 이것저것 검사하는 꽤나 정밀한 진찰 과정이었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한 것은 하루 종일 검사하고, 사진 찍고, 투시경을 장기 속에 집어넣고 하는 과정 동안에 한 번도 누구와도 내 몸상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었다.
아주 친절한(?) 어투로 훈련된 의사와 보조원들의 상투적인 진행에 필요한 ‘앉으세요, 누워보세요’하는 말 이외엔 별다른 대화가 없었던 것 같다.
며칠후, 결과는 컴퓨터 분석에서 나온 수치로 알려주는 정도였다. 다행히 아무런 병세가 없었기에 더욱 서로 할 대화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불성실한 느낌이었다.
필자의 경우는 신체검사이기 때문에 의사와의 대화가 별로 필요 없었다고 핑계 댈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요즘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간의 대화가 별로 필요치 않다.
의사가 환자와 긴 시간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병력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미리 짜여진 형식에 따라 ‘예’, ‘아니오’ 단답식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는데 반해, 환자들은 언제나 긴 ‘이야기’로 대답하고 싶어하는데도... .
의사가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병을 앓은 사람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에서 환자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수 있다. 환자가 의사의 질문에 대답할때 필연적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그 언어를 통하여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 스타일, 단어의 선택, 전개하는 논리 등으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증상을 환자가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말하는 사람이 수다스러운 사람인지 과묵한 사람인지도 알 수 있다.
‘치아가 시려요’를 표현하면서 절제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그 통증은 환자가 말하는 이상의 경우가 많고 ‘끔찍히, 매우, 지독히’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면, 대체로 그 환자의 통증은 표현보다 심하지 않은 증세라고 판단 할 수 있다.
환자가 증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그 설명하는 질병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말하는 속도, 음성의 높이, 목소리의 강도 등을 통해서 사람의 그 감성을 느낄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또 듣고 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의사의 지식은 검사나 측정을 통해서 얻어진 객관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인간성에 대한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한 주관적 지식도 진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문화에서는 환자에 대한 병력을 청취하면서 환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함을 줄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육체적 비밀이 노출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삶에 누군가 침투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사의 진찰실에서 옷을 벗는 일이나 입을 크게 벌리는 일에는 익숙해 있지만, 병력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사생활을 노출하는 일에는 그리 탐탁히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질병을 이해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 질병은 그 상태를 개념화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개념화 할 수는 없기 대문이다.
환자들의 인간성에 대한 고려로 인해 임상의학이 더욱 복잡해 졌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의학의 정밀성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현대의학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질병 자체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어 의료의 황폐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환자와의 관계에서 얻어진 정보 중에서도 의사들은 극히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 부분은 무시해 버린다. 환자들의 질병만이 의사의 관심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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