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 역사(34)] 조선연합치과의사회

  • 등록 2005.03.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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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6호에 이어>


1939년 9월 1일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 10월 1일에는 국민징용제도가 되고, 1940년 2월 21일에 육군이, 1941년 5월 28일에 해군이 치과군의관제를 실시했다.


1939년 4월 30일 제17회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총회는 출정황군위문 치과진료반 파견에 관한 건을 논의했고, 1939년 6월 29일 경성부 치과의사회 임시총회에서는 황군위문 치과진료반을 파견함에 따라 9월 2일 장병위문 치과진료반이 중국 북쪽으로 떠났다. 산서의 향토부대를 비롯하여 각 부대에서 치과진료일수 45일, 환자 연인원 5천9백11명을 치료했으며, 발치 1만2천여개를 하여 각 부대장의 감사장을 받고 11월 15일 귀환했다.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참석했으나 소외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1932년과 1933년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 평양치과의사회의 대의원으로 한동찬(韓東燦)이 참석하였다. 한동찬이 대의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치과의사회 회장이기 때문이었다. 평양치과의사회는 그 구성비에서 1926년 이후에는 한국인 치과의사가 일본인 치과의사보다 항상 많은 편이었다. 1928년 이전에는 한국인 치과의사와 일본인 치과의사가 별도로 단체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법정치과의사회가 곧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함께 단체를 구성하고, 회장 등 임원을 교대로 하기로 했었다.
1935년 9월 25일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인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하였다. 가입 동기는 종전에 개인적으로 입회하던 제도를 바꾸어 각 지방 치과의사회의 연합체인 조선연합치과의사회가 됨에 따라 지방치과의사회 조직을 확대하기로 했다. 확대 계획에 따라 함흥, 목포, 신의주, 전주, 광주, 평남, 수원, 개성,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도 가입하게 되었다. 한성치과의사회 등을 가입시켜 20개의 가맹회를 가지게 되자 조선연합치과의사회로서는 창립 15주년을 맞이해 축하식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후 한국인 치과의사를 대표하는 치과의사회로서 한성치과의사회 함석태와 조동흠은, 평양치과의사회의 한동찬과 같이,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평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에 이르러 박명진(朴明鎭)·박부영(朴扶榮)이 평의원이 되었다. 1940년에 최병지(崔丙智)·이창용(李昌鎔)·김찬규(金讚圭)·김성도(金性度)·김상문(金尙文)이 박명진·박부영과 같이 지방을 대표하는 평의원이 되었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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