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9호에 이어 계속>
경성치과의학회는 지부를 발족시켰다. 경성치과의학회 평양지부는 1932년 11월 11일에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평양 방문을 기회로 시작됐다. 남아 있는 당시 사진에 의하면 나기라 다쓰미를 포함한 14명의 평양 치과의사 중에 한국인 전훈조(田薰祚)·한종호(韓宗鎬)·이정신(李正信)·이삼엽(李三葉)이 포함돼 있었다. 1932년 12월 1일 경성치과의학회 경성지부 예회(例會)가 처음으로 열려 이후 1942년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경성치과의학회 부산지부는 1937년 4월 18일에 발회 돼 같은 해 7월 25일부터 6일간 하기 강습회를 갖기도 했다.
경성치과의학회는 학회지 ‘경성치과의학회잡지’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1932년 12월 1일에 발간을 시작으로 1년에 3∼4회 발행했다. 이 학회지는 총 25권으로 그 내용에는 원저, 종설, 실험, 임상, 초록, 총회 예회보, 회원동정, 교우회기, 부 록 등이 있다. 또한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야오 타로(失尾太郞)·니시야마 유기오(西山幸男)·히로타 세이이찌(弘田精一)·카키미 요죠(垣見庸三)·호리 타께시(堀武)·박명진의 박사 학위 주 논문이 게재됐다.
경성치과의학회는 총회의 진행에서도 조선치과의학회와 경쟁적이었다. 경성치과의학회의 제3회 총회는 1934년 9월 23일과 24일에 걸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강당에서 오전 8시부터 개최됐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병리약리학교실에서 처음 순서를 맡았고 부속의원 보철실에 근무하는 박명진의 ‘보철장치의 수자적(數字的) 관찰’이 총회 직전 연제였다. 2일에 걸쳐 70개의 연제가 발표됐다. 특별강연의 연사는 학회 준비에서 힘을 쏟는 일이었고, 청중에게는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강연은 특별강연이었다.
특히 경성치과의학회의 연사 중에는 마츠카제 켄지(松風憲二) 사장과 미야츠 하지메(宮津一) 공장장이 매년 참석해 치과재료에 관심을 표명했다. 경성치과의학회 총회에는 반드시 마츠카제 켄지가 출석했고 강연을 했다. 그리고 경성치과의학회 강연을 하는 때가 1개년 동안에 연구한 신제품의 완성이 경성치과의학회 총회에 맞추어 진다고 마츠카제 켄지는 늘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에게 말하곤 했다. 나기라 다쓰미는 마츠카제 켄지가 서울에 머물 때는 늘 나기라 다쓰미의 2층에서 지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치과의학회 총회는 정각 10시에 나기라 다쓰미 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우가끼 잇세이(宇垣一成) 총독의 축사에서 국민건강은 의료기관의 정비 보급 및 위생사상의 향상에 달려 있다는 사명의 중함을 언급하며, 또한 연구와 응용을 해서 본회의 목적을 달성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회무 보고, 의사(議事)와 역원개선, 도미따(富田)장학상수여 논문심사요지를 발표했다. 24일 오후 6시 간친회를 끝으로 총회는 막을 내렸다. 치과재료상의 전시는 고토우(後藤)풍운당치과부, 만선치과상회를 비롯한 18개 상점에서 참가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 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