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론/강신익]치과의사의 이름값

2005.08.08 00:00:00

6자회담에 나서는 미국 대표가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체어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불렀다고 해서 언론이 관심 있게 보도한 적이 있었다. 이전 같으면 그냥 이름만 부르거나 독재자란 접두어를 붙였을 텐데 이렇게 직함을 붙여 부른 것이 회담의 전망을 밝게 하는 징조란 해석이 덧붙여졌다. 왕조시대에 우리는 임금을 전하(殿下)라고 불렀고 공화정이 시작되고서도 각하(閣下)라는 호칭은 정통성을 갖추지 못한 최고지도자의 위엄을 지키는 장식으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형식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이제는 마지못해 ‘님’자를 붙이거나 그냥 이름만 불러도 크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병아리 치과의사 시절, 환자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에 무척 민감하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은 새파랗게 젊은 나를 ‘선생님’으로 불렀지만 간혹 ‘아저씨’ 또는 ‘총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개업 시절에는 여기에 원장이란 직함이 대학병원에 근무할 때는 과장이란 직함이 추가되었고, 진료를 그만두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을 때는 주로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지만 인턴에서부터 과장이나 교수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붙일 수 있는 호칭은 역시 선생님이다. 왜 의사는 남을 가르치지도 않고 나이가 많지 않은 경우에도 꼭 선생으로 불려야 하는 걸까? 아저씨라 불리는 것이 불쾌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질병을 다스리는 직업인은 醫를 행하는 사람(醫員 또는 醫者)이었지 醫에 관한 선생(醫師)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의원에게 선생의 지위가 부여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제정된 의사규칙에서 부터다. 이 규칙은 주로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서양의학을 전통의학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규칙과 이와 함께 제정된 치과의사규칙ㆍ의생규칙의 규정에 의해, 서양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醫師 또는 齒科醫師)으로, 전통의술을 행하는 사람은 여전히 배워야할 사람(醫生)으로 규정된다. 아무튼 이때서야 비로소 의학을 공부한 사람을 일반적으로 선생(師)으로 부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주로 중인 계급에 속하며 궂은 일만 도맡았던 의원(醫員)의 지위를 무지몽매한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의 지위로 끌어올린 중요한 사건이다. 실지로 백성을 가르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의학자들은 계몽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의사는 환자에게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환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이 역사상 의사들의 자율적 권위가 가장 존중된 시기였다. 의사를 선생으로 부르는 게 가장 자연스런 시기였던 셈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자율적 권위가 여러 방면에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식, 생식, 유전 분야에서 새로이 개발된 기술들은 기존의 생명 개념을 크게 흔들어 놓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사의 처방이 환자의 이익보다는 의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학을 모두 의사들에게 맡겨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이 싹트게 된다. 이로부터 의사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게 된다. 마치 폭력으로 정치권력을 찬탈한 사람을 각하라 부르며 굽실거리던 사람들이 민주화와 더불어 더 이상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듯이….


각하라 불리던 권력자들은 그 이름을 포기함으로써 민주화에 대응했다. 하지만 의사들이 선생이란 이름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각하란 이름은 권력의 상징이지만 선생이란 이름은 얼마든지 친근하고 포근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선생이란 이름에 값하는 치과의사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할 때인 것 같다. 새 시대의 의료인은 과거처럼 무지한 대중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선생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미리 헤아려주고 보듬어주며 함께 한다는 의미의 선생이어야 할 것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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