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57)]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와 야오 타로(失尾太郞)

2005.11.10 00:00:00

‘조선지치계(朝鮮之齒界)’라는 잡지를 이꾸다 싱호(生田信保)가 경성대학부속병원치과의장 이라는 입장에서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행하기 어렵게 되자 화장품신문의 다카하시 유키이치(高橋幸一)가 인수하여 ‘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야오 타로는 제1호부터 원고를 청탁받아 매호 공들여 글을 썼다.


야오 타로는 조선총독부 치과의사검정시험의 위원을 맡고 있는 관계로, 시험의원의 선생 측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독학자를 계몽하기 위해 오오테마에 산시로(大手前三四郞)라는 펜네임으로 약 2년간 글을 계속 기고했다. 글은 대단한 평판이 있었고 그 때문에 잡지도 잘 팔렸다.


어느 때 오오테마에 산시로의 내력을 입지전적으로 재미있게 쓴 결과로 잡지사에서 계속 주소를 물어오는 것에 어려움을 치렀다. 그것은 사부로가 오오사카(大阪)의 최고 치과의가 되어 하마테라에 별장을 가지고 10수명의 문하생이 있다는 이야기로 문하생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로 그 중에는 오오사카중(大阪中)을 방문한 열심가도 있었다. 이것은 아마 나기라 선생도 모를 것이다.


때로는 경성의 유명개업의를 만화로 하여 그 사람의 일화를 모아썼더니 본인이 아주 놀라서 도대체 필자가 누구인가 화제가 되었다. 이것도 누가 쓴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만화에는 실로 고군분투했다. 다행히 니시야 오모토시(西野重利)가 교실에 있었으므로 동군의 걸작이 또 화제가 되었다.
나기라 다쓰미를 필두로, 이꾸다 싱호(生田信保), 소토 케이죠(外圭三), 사노 후미오(佐野史郞),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히로세 분시치(廣瀨文質), 우에노 코오(上野孝),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니시노 데츠오(西野鐵男), 쿠로키(黑田) 등 여러 선생들이다. 니시노 데츠오(西野鐵男)은 “심한 장난을 하는 놈이 있다.”고 야오 타로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지만 당시 나인 줄을 몰랐던 것은 유쾌한 일이다.

 

라디오 방송과 야오 타로

 

경성에서 처음으로 라디오가 시험적으로 방송된 것은 1924년경이었다고 생각한다. B강당에 관계자를 모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수신 장치가 2000원이나 든 것에는 놀랐다. 본 방송은 아마 1926년부터이었다고 생각된다.
1930년인가, 1931년경 가을 “누구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치아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3일간 매일 20분씩 방송했다. 20분의 시간을 완전히 이용하여 그 당시 아나운서를 놀라게 한 일도 그때였다. 이것이 연고가 되어 아동극을 방송하도록 강연부에서 안이 나와 방송부장에게 억지를 써서 허가를 받았으나 큰 실패로 끝났다.


매년 방송변론대회에는 각 학교 강연부에서 한사람씩 대표선수를 뽑았다. 최초로는 오카와 히소무(小川潛)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물론 요시이(吉井), 츠카사키(塚崎)도 출전했다. 이 관계로 어느 해의 대회인지 사회자로 선발되어 당당하게 인사를 시작한 것은 좋았으나 도중에 원고가 행방불명되어 아주 당황했다. 나중에 모두에게 큰 웃음을 당한 실패도 있었다.


1944년 3월 모든 물건을 정리하고 경성을 떠나려고 할 때 방송부장이 학교에 와서 구강위생에 관해 방송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귀국 준비에 바빴기 때문에 오기하라 유이치로(萩原雄一郞)에게 부탁해 두었다. 반도에 있어서의 최후의 방송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한 마음이 든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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