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별난 강아지!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나는 애완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어느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갈 경우, 그 집에 강아지나 고양이, 그리고 그 밖의 동물들이 있는 걸 보면, 남들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 예쁘네요, 귀엽네요… ’ 뭐, 이런 말들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집 식구들이 키우는 강아지나 그 밖의 동물들이 나에게 다가오면, 집 주인에게 말은 못하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방금 기억나는 것으로는 예전 신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선교 수도회를 방문했을 때 일이 떠오릅니다. 그 수도회 마당에는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날, 그 개가 나에게 어슬렁 다가오더니, 이유 없이 나의 종아리를 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개가 나를 물을 것을 본 거기 수녀님이 달려오더니, 나에게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개에게 ‘많이 놀랐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꼴을 당한 후, 더욱 애완동물과 그 동물을 애지중지 키우는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라던데, 그런 말을 들으면, 동물에게 ‘반려’의 마음을 가지는 그 정성을 자기 가족이나 이웃에게 ‘좀 더 마음을 쓰라’고 항변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려동물’을 키우시는 분들은 나름대로 ‘반려동물’과의 추억과 함께, ‘우리 애(-반려 동물을 지칭함)가 보통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직하고, 변함없는, 아니 오로지 자기 주인만 사랑하는 그 마음,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애완동물’이건, ‘반려동물’이건 간에, 동물은 그들 나름의 본성대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런지, 나는 ‘애완, 반려 동물’들을 싫어합니다.
몇 일 전 일입니다. 추석 즈음 하며, 어느 가정에 처음으로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따라, 없는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그 집 벨을 눌렀더니, 안에서 왠 강아지 짖는 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습니다. 순간 본능적으로 내 몸이 위축되면서, ‘저 집, 강아지 키우시는구나, 아… ’ 강아지를 안고 나오는 형제님과 앞치마를 두른 자매님, 그리고 그 분의 딸, 이렇게 세 사람이 문을 열고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는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강아지의 배설물(?)이 없나 주위를 살폈더니,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암튼 그렇게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고, 나는 강아지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러다 식사를 차리시는데, 잠깐 그 부부가 김치를 내놓는데, ‘묵은지 김치를 낼까, 아니면 겉저리 김치를 낼까’ 하며, 아무 것도 아닌, 하지만 의견이 좀 충돌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 강아지가 그 부부를 향해 괴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부는 강아지에게, ‘아냐, 아냐, 우리 싸우는 거 아냐!’하며 오히려 강아지를 달랬습니다. ‘사람의 언성 좀 높다고, 저렇게 짖는 강아지가 있나! 참 별일도 다 있지… ’
그렇게 두 부부는 ‘묵은지 김치’와 ‘겉저리 김치’를 식탁에 함께 올려놓았고, 그 날 아침에 담근 것이라며, 양념 게장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내 주셔서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집 떠난 지 오래되어, 방금 한 뜨거운 밥을 먹으면 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는데, 그 강아지가 나에 대한 탐색이 끝났는지, 별안간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앉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거 좀 치워야 하는데…’ 그러자 그 부부는 별일이라며, 제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 저 녀석 때문에 우리가 오랜 동안 부부 싸움을 하지 못했어요. 아니 하면 큰일나요! 우리 집에서 언성이 높았다가는 밤새 이 방, 저 방을 돌면서 짖는데… 그래서 알았어요. 하느님께서 우리 부부가 하도 싸우니까, 싸우지 말라고 보내 준 평화의 사신이라는 걸. 이 녀석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고, 그렇게 목소리가 먼저 높아지지 않으니, 차분히 우리 부부는 서로의 이야기에 감정 없이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러다 보니 뭐 지금처럼 살아요. 그렇다고 부부 싸움을 위해서 이 녀석 피해 밖에 나가기도 그렇고. 그냥 서로 언성 낮추며 살아요.”
그 말을 듣고, 그 강아지를 한참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그 강아지도 나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듯 하였습니다.
‘어이, 강 신부. 너도 사람들 대할 때, 목소리부터 낮춰. 너의 목소리를 낮추면 낮출수록, 타인의 목소리와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이 분명하게 잘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 사람 마음의 진심 또한 잘 알 수 있을 거구! 살면서 목소리 좀 낮춰, 알겠지!’
별 망측한 강아지 다 보겠나 싶었지만 그 강아지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강아지 때문에 부부 싸움을 못하는 부부나, 강아지가 목소리 낮추며 살라는 말을 듣고, 목소리 낮추며 살려고 노력하는 나나, 강아지를 친구로 두면, 그런 일도 있나 봅니다. 아, 그래서 ‘애완동물’, ‘반려동물’을 키우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