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재와 도치의 출현은 필요가 수요를 충족시키는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개발 초기에는 씁쓸한 법정 다툼이 있었다.
파리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약제사 알렉시스 드샤또(Alexis Duchateau, 1714~1792)는 도재와 도치 제작에 첫 시도자였다.
드샤또는 어려서부터 이가 나뻐서 고생을 많이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일찍부터 의치를 사용하였다. 당시 의치상(denture base)은 주로 동물 뼈였다. 드샤또는 상아의치(ivory denture)를 끼고 있었다. 자신이 사용하는 상아의치는, 음식물이 잘 묻고 변색하는데다가 불쾌한 맛과 악취까지 풍겨서 늘 불만스러워 했다.
의치상 재료의 소요조건에 맞고 상쾌한 틀니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파리 근교 세브르(Sevres)에 있는 게라르(Guerhard)도자공장에서 의치를 만들어 자신도 쓰고 다른 의치 사용 환자들도 널리 사용하도록 시도하였다. 이를 1774년 국립외과학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치의학적 전문지식이 없어 많은 난관에 부닥치고 정열도 식어 흐지부지, 중단되는 듯 했다.
1788년 그는 니꼴라 드브와 드 샤망(Nicolas Dubois de Chemant)과 합동으로 도재의치 제작에 성공하였다. 드샤또는 새 도재의치(porcelain denture)를 끼고 만족하여 다시 약국업무에 열중했다. 샤망은 도재의 열처리 및 수축(shrinkage) 등에 골몰, 도재 반죽을 두 번이나 바꾸었다. 이는 색과 체적안정성(dimensional stability)을 개선하고 도치와 도재의치상(porcelain base)에 부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드디어 해냈다.
1788년 샤망은 자신의 발명을 왕립과학원과 파리대학교의과대학 교수회의에서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나아가 루이 16세로부터 특허를 받았다.
약제사 드샤또는, 치과의사 샤망이 자신이 발명한 것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샤망에게 특허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지만 샤망은 거절했다. 질투하던 샤망의 동료들까지 드샤또 편을 들었으며 아이디어를 도둑 했다고 했다.
드디어 약제사 드샤또는 치과의사 샤망을 고발하였다. 법정은 샤망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로써 샤망의 특허는 유효하게 되었다.
치과용 도재와 도치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의치상은 동물 뼈, 상아, 나무, 금판 등이 쓰였다. 인공치는 송아지 이(齒)나 시체에서 발거한 이, 해부실험실에서 나온 이를 사용했기 때문에 변색, 부패와 내구성에 문제가 많았다. 한 때 전쟁이 끝나면 전장 터에는 시체에서 치아를 빼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알 수 있다.
조건이 어울리는 언덕이나 동네 인근 노지에 도자기나 옹기를 구어 내는 가마, 적어도 집채만 한 불가마를, 치의학 선각자들은 실내 탁상에 놓고 도재치관을 제작하는 치과도재로(dental porcelain furnace)를 개발했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조작도 육감과 수동에서, 반자동과 전자동으로 변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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