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을 맡게 된 다음부터 다른 지역을 다녀올 일이 생겼다. 행사 뛰는 연예인이 아닌가 싶은 회장, 부회장의 일정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각 지역에서 열리는 학술대회라든지 지부행사, 여러 치과대학 행사에 임원들도 나누어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속한 지부나 출신학교를 안배하다 보니 나는 우리학교가 있는 광주에 주로 가게 되었다. 덕분에 졸업 후에 연고가 없어져 자주 찾지 못했던 우리학교에도 가보고, 우리 선배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 선배님들과 얼굴을 익힐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맺은 연으로, 직분을 내려놓은 다음에도 종종 기꺼운 자리로 불러주시니 감사할 일이다.
반가운 얼굴 보는 것은 좋은데 교통이 참 애매하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은 예전부터 사통팔달의 고장이라는 인식이 있다. 경부선 호남선이 다 지나가는 기차 길목인 데다, 서울과 비교적 가까우며 지하철로 직접 연결되고, 경부고속도로 축에 면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떠나 처음 수원에 자리를 잡는 데에는, 여차하면 아무 기차나 올라타도 30분이면 서울을 오갈 수 있다는 기대도 한 몫을 했다. 그런데 다 옛말이다. 지하철망은 늘어났지만, KTX와 SRT 노선에서 배제되고 나니 수원을 지나는 열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하루에 몇 오지도 않는 KTX 열차와 조우하기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행사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문을 일찍 닫고나와 일반열차를 타고 환승역에 가서, 고속열차를 기다렸다 갈아탄다. 간혹은 윷놀이에서 백도를 하듯,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후퇴했다가 서울에서 광주로 바로 가는 것이 더 빠를 때도 있다.
돌아오는 길은 답은 뻔한데 생각이 많아진다. 우선 퇴각할 시점을 고민해서 물리적으로 탑승 가능한 기차시간을 고른다. 공무로 가면 내 임무가 끝나고 나면 주인공을 배려해 적절한 시간에 나와드리는 것이 예의이고, 동문으로서 우리 잔치에 참석했을 경우 신데렐라처럼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기 직전까지 가능한 오래 머무려고 버텨본다. 그래봐야 결론은 SRT 막차이다.
늦은 시간대엔 열차 자체도 적지만, 고속열차를 타고 천안아산에 가든 오송에 가든 갈아탈 수 있는 일반 열차 자체가 없다. 집이 서울이라면 한밤에 용산역이나 수서역에서 내려도 괜찮겠지만, 아무리 서울과 가까워도 경기도민의 사정은 다르기 때문에, 서울 가는 기차들을 먼저 보내고, 동탄역에서 내려주는 마지막 SRT 열차를 한 시간쯤 홀로 기다릴 때가 많았다.
심야의 대합실은 참 적막하다. 다들 피로로 반쯤 졸고 있다. 막차인 기차를 타도 고요하다. 실내조명이 낮아지고, 대개의 승객들은 고단하게 잠이 든다. 깨어 있는 승객이나 업무 때문에 지나다녀야 하는 열차내 직원들도 주변 사람이 깰세라 나직나직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번은 그렇게 살풋 졸고 있다,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깨어버린 적이 있다.
어떤 승객이 지나가는 열차직원에게 자신은 잠들 테니 목적지에서 미리 깨워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무선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승무원보다는 객실장으로 보이는 직원은, 승객마다 개별목적지에서 깨워드리는 것은 직원의 업무영역이 아니고, 직원들이 계속 교대하며 객차를 이동하며 일을 하다 보면 그 시간에 맞춰 깨워달라고 전달하기도 어렵다며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알겠다 물러날 법도 한데, 이 승객은 직원이 서비스정신이 없다며, 기억했다 자신의 자리로 와서 깨워주면 될 일 아니냐고 따졌다. 예전 KTX 객실승무원이 있던 시절에는 그런 서비스가 있었는가 본데, SRT에서도 우기면 대강 들어주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직원은 원칙을 설명했다. 승객의 개별요청에 다 맞출 수도 없거니와, 그러다 정작 자신의 본업인 객차 안전관리 임무에 차질이 갈 수 있으니, 손님이 갖고 계신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추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한국적인 정서에서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 치고 깨워주겠다 물러나면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승객이 내리고 싶어하는 곳은 나와 같은 동탄역이었다. 나 말고도 동탄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손님이 객실 전체의 1/3은 되었건만, 선뜻 내가 깨워줄 테니 그만하시오라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사람이 너무나 막무가내라서, 나부터도 괜히 선의로 나섰다가 덤터기라도 쓸까 꺼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피곤했지만 곧 내려야 해서 눈을 뜨고 그 실랑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되풀이되는 억지에 직원은 결국 짜증 섞인 응답을 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승객은 예의가 없다는 둥 어느 학교를 나왔는데 이 모양이냐는 둥 막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사태는 본안을 벗어나 감정싸움으로 옮겨갔다.
대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갈등의 팔할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규칙에서 벗어난 요구와 논점을 떠난 시비,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싸움과 상처받은 자존심을 만회하고자 하는 분풀이성 고소 말이다. 애초에 승객이 책무를 벗어난 일을 요구한 것은 무리였고, 합당한 설명을 하였는데도 억지를 쓴 것도 잘못이다. 한 편으로는 직원이 말한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라는 대꾸는 꼰대어의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와 비슷한 면이 있어, 실상은 전혀 알아듣고 싶지도 않고 고려하고 싶지도 않다는 뉘앙스가 느껴져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호의가 권리가 되는 세상에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었다가는 추가적인 책임요구와 걸핏하면 소송까지 당하기 십상이라, 직원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신도 아닌데, 세상 일이 어디 내가 원하는대로만 돌아가겠는가. 거기에 남 탓을 하는 것은 비겁하고 미련한 노릇이다. 남은 내가 만든 계획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다 하여, 그걸 원망하며 싸움을 걸고 소송을 하는 모습을 남보기에 눈살 찌푸려질 일일 뿐이라는 것을 ‘낫살이나 먹은’ 승객 스스로만 모른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기 짝이 없다.
결국 기차가 동탄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승객 모두 잠을 설치고 불편하게 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 편을 들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불필요한 싸움 탓에 정작 중요한 승객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각자의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 걱정스러웠다.
우리 대한치과의사협회라는 기차의 종착역(終着驛)은 오송이나 동탄이 아니다. 34대 협회 이사회나 35대 지부장협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치과의사회원의 안녕과 발전, 대한민국 국민의 지속가능한 구강건강을 도모한다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 목소리를 낮추고 힘을 합쳐 나아가기도 바쁜 때라고 생각한다. 말을 업든 백도를 하든 곁가지에 한눈 팔지 말고, 지쳐가는 승객을 위해 목표를 향해 바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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