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만나는 철학이야기
미셸 푸코 : 담론, 권력, 주체 <8>

  • 등록 2003.08.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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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철학 비판(상) 우리가 잘 숙고된 하나의 분류를 수립할 때, 우리가 고양이와 개는, 설사 그들이 똑같이 길들여진 동물들이거나 또는 주인이 없는 동물들이라 해도 또 그들이 똑같이 미쳐 날뛴다 해도 그리고 그들이 똑같이 물단지를 깨뜨렸다 해도, 두 마리의 사냥개들보다 덜 유사하다고 말할 때,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분류를 뚜렷이 수립할 수 있게 해 주는 출발점, 토양은 어떤 것일까? 어떤 ‘받침대(table)’ 위에서, 동일성들의, 유사성들의, 유비들의 어떤 공간에 따라, 우리는 서로 상이한 그리고 서로 유사한 사물들을 분배해 왔던 것일까? 아프리오리하고 필연적인 연쇄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감각적인 내용들에 의해 부과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는 이 정합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말과 사물’ ‘말과 사물’(1966)은 같은 해에 출간된 라캉의 ‘에크리’와 더불어 구조주의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널리 회자됐다. 푸코 자신은 ‘구조주의자’라는 명칭에 대해 못마땅해 했고 또 실제 그를 구조주의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부당하지만, 적어도 ‘말과 사물’ 및 그 후에 발간된 ‘지식의 고고학’(1969)은 푸코 사유의 구조주의적인 측면을 뚜렷이 드러내 주는 작품들이다. ‘말과 사물’은 중국의 백과사전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며, 중국인들의 ‘분류체계’가 서구인들의 그것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담론사에서 나타나는 상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시한다. 요컨대 푸코는 주체와 대상의, 인간과 사물의 직접적인 만남은 적어도 인식의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사이에 하나의 장, 무의식적 규칙성들의 장, 선험적 질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험적 장(champ transcendantal) -- 객관적 선험 -- 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고 생각할 때,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구조주의가 성립한다. 풀어 말해 보자. 우리는 생물학 시간에 사과를 검다고 말하면 꾸중을 듣지만, 미술 시간에 검게 그릴 경우 경우에 따라서는 칭찬 받을 수도 있다. 또 생물학 시간에 다루는 사과와 지리학 시간, 경제학 시간에 다루는 사과는 같은 사과인데도 전혀 다룬 무엇이다. 이것은 사과라는 대상과 인간이라는 주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틀이, 인식론적 틀이 존재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시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자연‘天地’과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매우 다르다. 그 사이에 선험적 장이, 에피스테메가 변했기 때문이다. 푸코의 사유는 인식의 보편성과 객관성이라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인식의 다원성과 주관성을 강조한다. 보편성과 객관성의 신화가 역사를 억압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1198호에 계속> 철학아카데미 02)722-2871 www.acaphilo.co.kr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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