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50]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젊은 교수들 (상)

2005.09.01 00:00:00


1. 8월의 일요일에는 나기라 다쓰미를 따라 자주 인천으로 바다낚시 하러 갔다. 하세카와쵸(長谷川町)의 교사가 완성된 다음 해이었던가 학무국의 사람을 대접하는 뜻으로 낚시를 권해 우리도 함께 참여한 일도 있었다. 그때는 3척으로 나누어 아침부터 낚싯대를 드리워놓았다. 아주 운이 좋았는지 아나고 큰놈을 40마리나 잡아 올렸다. 이것을 선물로 드렸더니 댁으로 가지고 가서 요리로 구워진 것이 아침녘이 될 정도로 뜻하지 않은 폐를 끼쳤던 적도 있었다.


또 어느 때는 조기만 잡혀 처치 곤란할 때도 있었다. 나기라 다쓰미의 집에서 요리하여 모두 먹어 보았는데 그 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신선한 것은 조기라도 맛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마에다 세이지(前田正次), 니시야마 유키오(西山幸男), 모리후지 요지(森藤陽三), 야오 타로(失尾太郞)의 4인이 팔미도까지 진출해서 얻기도 힘든 아나고를 잡았다. 제일 못 잡기로 유명한 야오 타로(失尾太郞)는 때때로 쓰레기를 잡아 웃음거리가 되었다.


2. 이것은 정말 기막힌 진실한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한 가지 공모한 장난인데 지금은 시효가 지난 사건이다. 나기라 다쓰미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우리들 젊은이에게 “자네들은 안돼, 한꺼번에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한다. 많이 마시고 한번 재미있게 소란을 펴보게”라고 말씀한다. 내심 젊은이들이 기개가 없다고 하는 것에 화가 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우리들의 의지를 보여주자고 하였다.


때는 6월말 여름이 한창인 저녁 서산장(西山莊)에서 강습회의 위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하여, 모두 뜻을 합쳐 일찍이 회장으로 향하였다. 나기라 다쓰미가 오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 나기라 다쓰미는 그날 경성그라운드에서 야구를 관람하여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상태였다. 절호의 기회는 이 때 뿐이었다. 나기라 다쓰미에게 안주를 드실 틈도 주지 않고 모두 빠르게 주거니 받거니 계속하여 공격에 열심을 다했다. 그리하여 이쪽저쪽이 술에 취해 마루기둥과 씨름하는 사람, 마루 밑에 넘어져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죽을 각오로 혼신의 용기를 다해 분전하여 모두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끝났다.


다음날 나기라 다쓰미는 몸이 저려서 그 유명하게 부지런한 선생도 드디어 여느 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젊은이들이 기개가 없다”고 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일단 이겼다”고 하였지만 왠지 선생의 입에서 다시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아 쓸쓸함이 언제까지고 남았다.


3. 하세카와쵸로 이사한 후 만주에서 쿠와야마 쿠니마츠가 부임하였다. 그 후 니시야마 유키오, 쿠와야마 쿠니마츠, 모리후지 요지, 야오 타로의 4인이 모여 피서용 마작을 하자는 악우들의 이야기가 모아졌다. 여름방학의 오후 나의 교실에서 공부를 제쳐놓고 매일 마작을 하였다. 어느 날 문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 교장선생이 와서 약간 혼이 났다. 근무시간외였으므로 문제될 일은 없었으나 패가 눈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나기라 다쓰미는 웃으면서 관전하며, “거 야오 타로군 이겼잖아” 하는 데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근무시간외라고는 하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하여 사진 암실에서 더위를 참으며 벗은 채로 땀을 흘리면서 계속하였다. 마작은 9월 학기 초까지 계속되었고 판이 끝난 후에 중국요리로 한잔한 것은 물론이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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