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부속병원이나 전공의 수련병원이 아닌, 치과대학에서 일하게 된 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국군병원에서 근무한 이후 삼성서울병원 펠로우로 복귀할지, 개원을 할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 지금은 고인이 된 레지던트 동기가 단국대 치과대학 마취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안했고, 나는 큰 망설임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고향이 거창인 만큼 서울의 복잡한 생활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뇨를 비롯한 여러 지병을 앓고 계신 홀어머니가 고향에 홀로 계셨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필요할 때 곧바로 찾아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이 단국대 치과대학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 그렇게 아무 연고도 없던 천안에서의 교수 생활이 시작됐고,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교수로서의 자율성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큰 부담이었다. 그전까지는 이미 짜인 시스템 안에서 일했다면, 치과대학에서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다. 마취과 선임자도 없었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이는 대부분 치과의사뿐이었다.
치과 진료의 특수성 역시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국소마취제 카트리지가 1.8mL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전신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나 약제의 구성 성분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혈제로 사용하는 염화알루미늄 황산철, 하이스피드 핸드피스에서 발생하는 고압 공기가 전신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지 못한,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의 초보 의사였다. 이후 의료사건 감정과 여러 사례를 접하며, 지혈제는 혈전에 의해, 핸드피스는 공기에 의해 색전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일본 자매대학으로 한 달간 연수를 다녀왔다. 이 경험은 시야를 크게 넓혀줬다. 일본에서는 이미 치과마취과 전문의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인턴과 레지던트뿐 아니라 석·박사 과정 인력도 풍부했다. 이들은 입원 암 환자와 양악수술을 위한 수술실 마취, 당일 외래수술 마취, 임플란트 센터의 진정법, 통증 외래, 장애인 진료를 위한 특수마취 등 5개 분야에서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치과마취과 전문의 제도 도입을 위한 학회 차원의 노력이 이어졌지만, 끝내 제도화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던 장애인 전신마취 분야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국내 최초로 개소한 충남권역 장애인구강진료센터의 센터장을 맡으며 진료 활성화를 위해 매일 아침 직원들과 회의를 했고, 행정 과정에서의 마찰도 잦았다. 수련의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장애인 시설을 찾아다니며 검진과 홍보를 진행했고, 성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홍보 영상에도 직접 출연했다. 그 결과 2009년 이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장애인 전신마취 진료 건수를 기록하게 됐다. 이후 경기권역과 세종권역 센터까지 추가로 유치하며 중증 장애 환자 진료 중심의 차별화된 모델을 구축했다. 현재도 매년 전국 최다 전신마취 진료 실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서울대 중앙센터보다 많은 건수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활동 역시 지속해왔다.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가 각종 진정법 연수회 강의를 진행했고, 안전 가이드라인 제작과 응급처치 및 CPR 교육에도 참여했다. 나아가 세계 최초의 치과 전문 소생술 과정인 DALS를 개발해 미국심장학회와 대한심폐소생협회 공식 교육과정으로 등록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치과마취학 정기 학술대회 역시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해 왔고, 현재는 대한치과마취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돌이켜보면 위기와 고비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것은 철저한 루틴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구와 집필로 바쁜 시기에도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 단국대 호수, 천호지 둘레 걷기다. 호수 둘레는 약 2.3km로 3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고, 천안 8경 중 하나로 시민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다. 과거에는 고혈압의 원인을 대부분 본태성으로 설명했지만, 최근에는 혈당 스파이크로 인한 혈관 내피세포 손상이 주요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호수 둘레 걷기는 혈당 스파이크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자, 내 혈관과 치과대학에서의 삶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윤활유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각,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에게 산책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생각을 정렬하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발걸음의 리듬만큼은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며, 그는 삶을 이성이 붙잡아 두는 법을 몸으로 실천했다. 나는 그 산책을 떠올릴 때마다 묻는다. 하루를 살아내는 나의 시간은 과연 얼마나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인가를. 칸트의 산책길은 쾨니히스베르크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려는 모든 사람의 하루 속에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