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국에 막 소개된 열린 시스템의 구강스캐너 iTero 앞에 선 나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당시 아날로그 인상 채득에 익숙했던 내 손은 스캐너 렌즈 앞에서 어색하게 떨렸다. “이게 과연 임상에서 통할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서툰 실력으로 수 차례의 실패 영상 얻기를 거듭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스캔이 완성된 후, 컴퓨터 화면에 완성된 3D 모델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작은 기계가 치의학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해 가을 대전에서 열린 대한치과보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구강스캐너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느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임상 현장에서 디지털 워크플로우를 직접 구축하기 시작했다. CAD-CAM 설계와 3D 프린팅 보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오차 하나하나가 환자 치료 결과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밤새 문헌을 뒤지고 실험을 반복했다. 실패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 과정이 쌓여 임상시험 설계로 이어졌고, 구강스캐너 정확도 검증과 세라믹 3D 프린팅 소재 평가 결과를 SCI급 저널에 발표하는 성과를 이루어냈으며 ‘디지털 치과 전도사’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기술 발
치과 조직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치과의 구조와 인력 시장은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불편하면서도, 점차 적응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치과에서 실무 교육을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며, 수많은 조직을 컨설팅하면서 성공한 치과의 공통된 원칙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과 ‘효율적인 조직 운영’이다. 모두가 알지만 이런 직원을 만나지 못한다 하고, 원장님은 효율적 조직 운영이 무엇인지를 몰라 많은 강의를 듣고 컨설팅을 고민한다. 성공한 치과 조직의 법칙 소위 성공했다고 말하는 A 원장님과 인터뷰를 했을 때, 언제가 가장 효율적이었는지 물어봤다. 1인 치과로 시작해 대형 치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익성을 보였던 시기를 떠올려보았더니. “가장 효율적이었던 때는 내가 혼자 진료하고 직원이 5~6명 정도였을 때인거 같다.” 조직이 커질수록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힘을 조금씩 빼고, 무임승차하는 직원들이 생긴다. 이는 ‘링겔만 법칙’에서도 증명된 사실이다. 규모가 다르고, 원장, 직원의 역량에 따라 시작이 다양할 수는 있지만 결과는 효율적으로 도출하는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린치핀: 필요한 사람이 되는 법 세스 고딘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선택부터 졸업 후 진로와 같은 큰 결정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되묻기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번 국가고시 준비 과정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휴식 시간에 친구들 사이에 오갔던 단골 질문이 “너는 어떻게 공부해?”였을 만큼 어떠한 공부 방법을 선택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었습니다. 실기 연습과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 맞는지, 혹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불합격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아마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다른 분들도 같은 고민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고민에서 오는 불안감은 국가고시 준비 기간을 상당히 힘들게 하였습니다. 목표를 이루는 데는 여러 길이 있고, 성공의 여부는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을 어떻게 걸어 나가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고시가 끝난 지금, 그 당시를 돌이켜보며 저는 어떠한 생각으로 불안감을 해결하고, 선택한 길을 나아갈 수 있었는지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
내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의사도 아파요?”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의사는 어떤지 몰라도 치과의사는 가끔 아플 때도 있어요”라고 답을 한다. 의사도 아프다. 그렇지만 아프다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환자가 실망을 한다. 사람 몸에 대해서 많이 아는,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지킬 걸 잘 지키는 의사들마저 아프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고 덜 지키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야말로 건강에 대해서 기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는 전지전능이어야 한다. 아파서는 안 된다. 혹시 감기라도 걸려서 근처 내과에 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여기 원장님하고 친해서 놀러왔다”라고 해야 한다. 결코 의사는 아파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의사도 좋은 일인데 현실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의사도 아프다. 언젠가 어지럼증이 생겨 병원에 갔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여 여기저기를 다니다 안 돼 강남 성모병원 신경과를 소개 받아 갔다가 다시 이비인후과를 소개 받았다. 하도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나는 대충 오전 11시쯤으로 예약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며칠 전에 어떤 검사를 하고 그 날 결과를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1시 반이 되어도
봄은 단연 산수유의 계절이다. 물론 봄의 여왕인 벚꽃, 사군자의 매화, 동요 속의 개나리 등 전통적인 봄의 강자(强者)들이 있음에도 길고 추운 겨울 후 갑자기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마치 고대하던 올림픽 첫 금메달처럼 너무 반가워서 탄성이 나올 지경이다. 이처럼 산수유는 봄을 가장 빨리 알리는 나무다. 도시 곳곳에 노란 산수유 꽃이 필 때쯤이면 겨울은 완전히 지나갔고 이제부터는 봄을 즐기면 된다. 산수유는 학창 시절 김종길의 시(詩) 성탄제(聖誕祭)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낯익은 나무로 아파트단지에도 학교에도 도로에도 곳곳에 심겨 있는데 그동안은 몰랐다가 봄이 시작되면 노랗게 사방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또 가을이 되면 나뭇가지 곳곳에 이 작고 붉은 열매들이 일제히 나타나 겨울까지 남아 새들의 양식이 되어주니 실제로 한 해가 산수유로 시작해서 산수유로 끝난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산수유는 높이 5~7m로 자라는 소교목으로 수피(樹皮)는 회갈색으로 심하게 벗겨지며 잎은 층층나뭇과의 전형적인 특징인 잎맥이 잎끝까지 연결되는 나란히맥을 보인다. 산수유는 보통 3월이면 꽃망울을 터트리는데 노란 꽃은 잎보다 먼저 피어나서 나무 전체를 노
을사년 새해의 설 연휴도 지났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 병원을 내원한 장애인 환자분들을 돌아보며, 그분들에 대한 올 한 해의 저의 새해 소망도 기원해 봅니다. (실명 사용을 동의받은 오민택 군과 최명숙 님을 제외한 다른 성명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민택이, 근 4~5년 만에 내원했구나. 98년 네가 8살 초등학교 입학 시 처음 우리병원에 부모님과 휠체어를 타고 내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서른을 훌쩍 넘어서 턱에는 수염이 가득 찬 청년이 되었네. 기억나니? 20년도 훨씬 전 나에게 치료를 받고 마치는 날 편지봉투를 선물로 줬지. 제대로 읽기 어려운 서체로 봉투에 이름을 적고, 나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던 우리 민택이, 이제는 너를 처음 치료했던 30대의 나도 50살을 훌쩍 넘어 60살을 향해 가고 있고, 같이 내원 하셨던 부모님도 너를 체어에 옮기기 힘 부쳐 하는 70이 넘으신 나이가 되셨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민택이에게 이 선생님이 최선의 치료를 해 주었는가 반성도 하게 된다. 올해는 민택이 다른 합병증 없이 건강한 한 해가 되고 이제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너를 사랑하고 서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마
치의신보 최 기자가 뜻밖에도 글(수필) 한 편을 부탁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10여 년 전엔 생각지 않던 ‘건치신문’ 논설위원이 되어 글쓰기 훈련을 했는데, 이제부터는 수필 수련을 하게 되나 보다. 응답 후 바로 글 제목으로 <운구기일(運九技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는 스스로 재능이나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다며 평소에 자주 입에 올리던 말이다. 화투 놀이에서 듣던 ‘운칠기삼(運七技三)’보다 더한 운을 타고 났다는 의미다. 한데 얼마 전 치과의사협회 신년하례식에서 올해의 상을 받은 ‘수필’이 생각나며, 과연 멋진 글이 가능할까? 하필이면 치의신보에 실린 치과의사 문인회 이야기 중, 글솜씨 고수들이 모여 품평회도 한다기에 문인회 회원이 아닌데도 걱정이 좀 됐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했든가? 어울리지 않는 ‘사자성어’까지 생각났다. 망구(望九)를 지나 이날까지 겪은 크나큰 운(運)으로는 일곱 살 때 2층 창틀을 넘어 떨어져 의식을 잃으며, 한쪽 눈에서의 출혈 이후 시력이 점차 사라지긴 했지만 바로 다음 날 깨어난 일이 첫째요, 바로 석 달 전 출근길에 콘크리트 기둥을 받으며 에어백이 터지는 교통사고로 폐차를 하면서도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 물귀신 소문이 헛도는 음습한 상가복 소류지를 지나면 당제로 금줄 묶인 500년 묵은 고목나무가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있는 개울가. 그 언덕 위로 있는 파란 지붕의 파실댁. 나는 해가 일찍이 져 사과가 잘 맺힌다는 어느 골짜기 마을의 파실댁을 추억해본다. 이장 글씨가 새겨진 초록 모자며 때 탄 팔토시. 귀에 꽂은 라일락 한 개비. 화훼공판장에서 받아 온 천년초 가시가 뭣 모르고 설쳐대던 손바닥에 박혀있다. 어린아이 앞에서 매캐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것 치곤 자상한 손길. 선인장 가시를 뽑아내며 담부터 조심하라 타박하던 주름진 얼굴. 그게 내 첫 기억의 시작이다. 산골에서 읍내까지 이어진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와서 장에 가려거든 차를 타고 족히 30분은 가야 했다. 삼남매는 흰 트럭의 조수석과 보조 조수석을 차지하고 오일장에 갔다. 수확철이면 닭이며 개며 온갖 것들을 파는 장에서는 사과를 팔았다. 일 년 일해서 하루 버는 농사꾼이라는 직업이 좋은 것은 분명했다. 당시 사과 한 콘테나에 2~3만 원 웃도는 시세라 몇 박스 팔면 들어오는 액수가 꽤나 쏠쏠했던 것인지 번 돈으로 중화집에서 간짜장이며 탕수육을 꼭 시켜 먹었다
2023년 9월 건물 임대 계약이 끝나 강남 한복판으로 치과가 이사를 가게 됐다. 강남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한 가지 걱정이 문득 생겼다. 수많은 의료기관들이 각기 다른 마케팅 전략과 연간 억대 홍보 비용을 사용하며 경쟁을 하고 있어 강남 한복판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면 신환과 구환 관리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사 온 지 불과 2년 안에 별다른 외부 홍보 없이도 환자 수를 지키는 것과 매출이 소소하게 증가하게 됐다. 갑작스럽게 강남 한복판으로 이사하게 된 우리 치과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고 광고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도 기존 환자를 유지하고 신환을 유치할 수 있었는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치과가 강남 한복판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의료의 본질’을 지키며 기존에 잘해오던 ‘계속구강관리’를 더욱 잘해나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2023년 신년회에서 대표 원장님은 병원의 2030 비전과 그해 목표를 공유하며 이를 직원들과 함께 이루어 나가자고 독려했다. 그중 가장 강조된 부분은 병원 내 구강건강관리과의 신설이었다. 이미 2010년부터 병원에서 계속구강관리를 특화 진료로 진행해
2006년 수원 인계동에서 개원한 나는 간판을 올리기 전에 주변 원장님들께 인사를 하러 다녔다. 그중에서 옆 건물 치과원장님 몇 분이 가장 반겨주셨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식사를 같이하게 되어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설립자이신 박흥식 원장님께 한가족진료소가 시작된 배경부터 설립취지 및 그동안의 과정을 꾸준히 들어온 나로서는 수원시 임원을 하는 동안에 진료봉사에 동참하게 되었고 세월의 격변을 거치며 한가족진료소가 문을 닫기까지의 과정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보험틀니가 시작되면서 무료틀니 봉사가 어렵게 되었고 취약계층 청소년에게 치료해주는 사업도 대상자선정에 난관에 부딪히며 잠정적인 운영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어느새 잊혀진 공간으로 남겨졌다. 경기도치과의사회 회관 건물 2층에 자리한 한가족진료소는 6년 동안 방치되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공간을 새로운 컨셉으로 한가족센터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봉사와 교육을 함께 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그려보았다. 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해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때 용기 내어 우리 수원시 회원분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했
안녕하세요? 저는 전북 남원 한치과의원 원장 한상수입니다. 2001년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 남원시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병역을 마친 뒤 전북 남원에 2004년부터 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개업 후 다른 개업의들처럼 거의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었고 운동도 특별히 하는 것이 없던 저에게 작은 계기가 생겨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일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거주하는 전주에 아이스 링크장이 있는데 아이들을 스케이트 운동을 시키면 좋겠다는 집사람 말을 듣고 저는 처음에는 반대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발에 칼(?)을 매달고 하는 운동이라 다칠까봐서 너무 위험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이 알아보더니 안전하게 교육을 받고 타면 괜찮다고 해 결국 제 아이들이 빙상장에서 스케이팅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빙상장까지 픽업을 해주게 되었고 빙상장에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강사님께 저도 한번 배워 볼 수 있냐고 물어본 게 2016년 가을이었습니다. 40이 다 되어서 스케이트를 탈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아이들 타는걸 보니 재미있어 보여 용기를 내본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강사님께 배워 본 적이 없었고 운동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