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중진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선진 한국에서 살고 있다. 한글, K-의류, K-팝송, K-뷰티, K-식품, K-문화, K-방산, K-메디칼 등 한국의 사회·문화·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세계인들이 한국을 흉내내고 체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연스레 스며든 선진 한국에 자부심을 느낀다. 2016년 “의료 해외진출 및 외국인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의료해외진출법’) 제정에 관여하면서 정부의 해외환자유치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같은 해 법령에 따라 ‘의료통역사 능력검정시험’이 시행되었고, 당연히 10년째 의료통역사검정시험위원장으로서도 ’영중일러아몽베‘라는 필요했던 의료통역사를 매년 양성하고 있으며, 최근 태국인 환자의 급격한 증가추세로 2026년부터는 통역사 시험에 태국어를 추가로 실시할 예정이다. 2009년에 보건복지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해외의료진출에 대한 행정과 제도적 준비를 시작하면서 의료계에 처음으로 해외환자유치를 허용했었는데 당해 6만 여명의 해외환자가 다녀갔었다. 이후 국내에 지속된 해외환자의 증가로 의료해외진출법의 태동 이유가 되었던 것인데, 우리 치과계는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이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 성적이 잘 나올 줄 알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스터디 플래너 속 계획들을 볼펜으로 그어가며 흔히 ‘순공시간’이라고 하는 숫자로 하루의 만족도를 평가했다. 성취의 기쁨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결과를 향한 조급함 속에 있었고,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 자신에게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스트레스와 걱정의 연속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치과대학 입학식에 참석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입학 후의 나는 또 다른 긴 여정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환자의 구강 건강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이었다. 본과 진급 전, 모두가 잠시 쉬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습관을 놓지 못했다. 새내기였지만 마음의 여유는 없었고, 오랜 완벽주의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낸 것도 아니었고, 언제나 잡히지 않는 목표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오히려 지쳐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 소중한 시기를 조금 더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치과대학 생활은 언제나 잔잔하게 바쁘다. 실습, 강의, PBCL,
저는 의료정보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이자 변호사로, 현재는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자회사에서는 바이오텍과 메드텍 스타트업 투자를 겸하고 있습니다. 최근 초등학생 딸이 진로탐색 관련 학교 숙제로 “아빠는 직업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잠시 머뭇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제 정체성의 중심에는 여전히 ‘치과의사’라는 이름이 가장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제 일상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로 가득합니다. ‘치과의사/변호사’라고 적힌 명함을 주고받고 나면 어김없이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치과의사를 그만두셨어요?” 하도 자주 받아서, 명함 한쪽에 간략한 설명을 인쇄해둘까 농담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뚜렷하고, 쉽게 다른 일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의아함의 밑바탕에는 결국 “치과의사는 편하게 돈 잘 번다”라는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는 제 아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외삼촌, 멀리는 지난달 제가 스케일링을 받은 송도 사무실 건물의 치과 원장님까지... 각양각색의 진료실을 지켜본 제 결론은 명확합니다. 치과의사는 결코 ‘편하게 돈 잘 버
본과 4학년이 되었고 어느덧 치과의사가 되기까지 국가고시 한걸음만을 남겨두고 있다. 병원 전공의 선생님들과 현직에서 어려운 케이스를 해내고, 발표하는 여러 선배님을 보고 있자면, 머지않을 미래가 가까운 듯 먼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당장 현장에 나가기 일보 직전인 이 시기에, 지금까지의 본과 생활을 되짚어보며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앞으로 무엇을 원하게 될지 그려볼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는 각자 어떤 치과의사가 되기를 원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전국 11개 치과대학 모두 비슷할 텐데, 1학년 때는 주로 생리/조직 등 생명현상 기초에 대한 이론 수업에, 2학년 때는 임상 과목 진입과 함께 방대한 ‘전임상 실습’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3학년 때 비로소 원내생이 되어 병원 안에서 실제 환자를 마주하며 ‘임상 실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동시에 수업 또한 더 많은 임상 과목으로 확장하여 대부분의 치과 전공에 대해 공부한다. 졸업을 위해 요구되는 임상 케이스도 과별로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정신없이 해 나가다 보면 치과의사가 되기까지 1년이 채 남지 않는다. 어느 학교건 치과대학생들은 4년 동안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을 소화하기에도 벅차다. 개인
저는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면, 합창 연습을 하러 순천 연향동에 있는 연습실로 갑니다. 분주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연습실 의자에 앉으면, 졸음이 연신 나오고, 목소리 트레이닝으로 아아아~아아를 시작하고, 지난주에 배웠던 노래를 다시 반복하여 부르고, 파트별 연습을 돌아가면서 합니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다 보면 노래에 푹 빠지게 되고, 살짝 몸의 열이 나면서 만족감에 빠집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합창단은 일반 순천 시민들이 단원들로, 주부부터 회사생활을 하는 분들, 퇴직한 교사, 자영업을 하는 분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합창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로 함께 합니다. 먼저 합창은 무엇일까요? 제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여러 사람이 여러 성부로 나뉘어 서로 화성을 이루면서 다른 선율로 노래를 부름, 또는 그 노래” 이렇게 나옵니다. 저희 합창단은 현재 4개의 파트 즉 여성은 알토, 소프라노 남성은 테너, 베이스 이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여성은 25명 정도, 남성은 12명 정도가 활동합니다. 참고로 저는 소프라노 파트로, 오선지를 넘어가는 노래는 호흡이 매우 딸리며, 반복 연습을 통해, 다른 파트원들과 힘을 내어 극복을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노래도 무대에
버스 차창의 와이퍼가 새똥을 죽 밀어냈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은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렇기에 나는 흥미롭게 창문을 지켜봤다. 버스 기사는 못마땅한지 쯧, 혀 차는 소리를 내고 워셔액으로 똥을 닦아냈다. 금세 창문은 멀끔해졌다. 집에는 얼마 만에 내려가는 것인지 새삼 떠올려보았다. 다섯, 여섯 달만이었다. 본가를 떠나 상경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홀로 떨어져 지내다 보면 집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기공 실습이라도 있는 날엔 왁스 증기나 석고 가루 따위가 목 안을 빽빽하게 채우는데, 그럴 때마다 집에서 얼큰하게 끓여낸 김치찌개가 간절해졌다. 갓 지은 보리밥을 숟가락으로 욱여넣고 국물이 밥알에 쫙 배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치와 고기를 올려 입안 가득 차게 넣으면 케케묵은 먼지들은 단숨에 내려갈 듯싶었다. 고향이 조금씩 낯설어질 때마다 떠밀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언제 한 번은 새벽에 엄마에게, 옛날에 춘천으로 놀러 가서 네 식구가 하나씩 만든 도자기 중 내가 만든 컵이 깨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몽사몽간에 무슨 컵이지 스스로 되물었다가 문득 길쭉했던 도자기 컵 하나가 생각났다. 오늘은 나가더라도 차조심, 사람조심, 물조심, 불조심하거라
치매는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치매 없는 나라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치매 발병을 늦추고 돌봄 부담을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치매안전국가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예방과 돌봄의 치매 안전벨트를 채워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그 목표를 위해 ‘치매 발병을 3년 늦추고, 가족의 돌봄 부담을 30% 줄인다’는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본이 국가정책으로 치매 발병을 1년 늦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대한민국은 더 도전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발병을 3년 늦추면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사회 전체의 돌봄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30% 부담 경감은 가족과 사회 모두에게 현실적 희망을 주는 약속이다. 이때 핵심 중의 핵심은 구강관리다. 치주질환 원인균이 치매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이미 다수 축적되어 있으며, 자연치아를 20개 이상 지킨 노인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치매 발생률이 크게 낮다는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씹는 힘을 지키고, 뇌를 자극하며, 치매를 늦추는 힘이 바로 치아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치아 보존 → 씹는 힘 유지 → 뇌 자극 → 치매 예방’이라는 연결고리가
올해도 어김없이 아파트 주차장 초입에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무더운 여름내내 피어서 출퇴근 시에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열흘 넘게 피는 꽃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백일 넘게 붉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 ‘백일홍 나무’라고 불렀다. 소리가 바뀌어서 배롱나무라는 예쁜 이름으로 굳어졌다.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한다. 백일홍이라면 멕시코 원산 백일홍을 먼저 떠 올리게 된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 전혀 무관하다. 배롱나무는 나무이고 백일홍은 풀이다. 배롱나무는 여름에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 맺고 낙엽까지 다 마친 뒤에도 살아서 이듬 해 봄에 다시 새 가지 새 잎을 내는 나무이고, 백일홍은 꽃이 핀 뒤에 시들어서 지면 땅위에 올라 왔던 부분은 가을 지나 사라지는 꽃이다. 자연스레 이름만으로도 이제는 백일홍과 배롱나무를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고 했지만 하나의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은 것은 아니다. 수많은 꽃들이 차례대로 피어나는데 그 기간이 백 일이나 계속된다. 배롱나무의 꽃은 한여름에서부터 가을까지 가지 끝에서 고깔 모양의 꽃차례를 이루며 한 뼘이 넘는 크기로 뭉쳐서 피어나는데 꽃송이 하나하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현대와 같은 고도의 분업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의 하루를 돌아보면,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아니 잠이 든 순간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살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을 다 만나서 교류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살아간다. 특히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만나는 사람의 수와 종류는 더욱더 줄어든다. 40대 치과의사로서 나는 매일 루틴한 생활을 보내면서, 거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접하고 느끼는 세상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는 누구나 그렇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나의 세상의 제한성은 더 커지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다른 세상에 대한 관용성도 매우 줄어든다. 의정사태를 겪으면서 의료인이 아닌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낀 적이 많다. 내 생각에는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다툼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세상에서 본 의사들
아침마다 치과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것은 텅 빈 대기실이다. 의자와 유니트 체어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새벽의 정적 속에서 바라보면 낯설고도 묘한 고요함이 감돈다. 그때 나는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을 즐긴다. 책을 펼치거나 음악을 틀어놓거나,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한다. 마음이 무거울 때면 네덜란드 거리에서 노래하던 마르틴 후르켄스의 You raise me up을 찾아 듣는다. 꾸밈없이 성실하게 불러내는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는 영혼을 다독여 준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라는 가사가 흘러나올 때면, 마치 내 지난날과 지금의 삶을 함께 노래하는 듯하다. 책상 위의 화분들은 묵묵히 곁을 지켜준다. 손끝으로 잎을 만지면 물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내 방의 녹보수는 몇 해째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환자들은 신기하다며 비결을 묻지만, 사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햇살과 흙과 물이 제 몫을 다했을 뿐, 나는 다만 곁에 있어 주었을 뿐이다. 환자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성껏 살피되,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 의사의 몫일 것이다. 요즘 후배들이 종
누구나 자신만의 소망이 있다. 먼 미래에 나를 그리는 원대한 꿈도 있고, 도파민과 스트레스에 따라, 순간순간 이끌리는 바람도 있다. 99년에는 누구보다 스타크래프트를 잘하고 싶었고, (4 드론이 실패하면, 전원을 끄고 도망치기도 했다) 병리학 시험을 보기 직전에는 세상이 멈추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다. (병리학 교실 바닥은 차가웠고, 나의 무릎은 시큰했다.) 그리고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갔을 땐, 그저 건강한 우리를 바랐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가져온 소망은, 나만의 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몰라스’라는 밴드를 하며, 수년간 노래를 불렀지만, 내 노래를 갖고 싶다는 바람은 줄곧 내 안에 커지고 있었다. 두 번의 개원을 하고, 두 명의 아이 그리고 한 명의 아내와 15년을 살던 나는 조용히 보컬 레슨을 등록했다. 노래하는 방법과 작곡하는 방법을 배우며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고 하나의 노래를 만들었다. 선생님의 권유에, 가수 이름을 만들려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본명을 쓰기엔 부끄럽고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을 조합하니 우스운 단어가 나왔다. 현대과학의 도움을 받기 위해 ChatGPT에 문의하였으나, 그분의 개성 있는 명명에 나는 당황하였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