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깊이는 그가 가진 힘이 아니라 그가 만든 태도에서 결정된다 - 니체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인간은 사회의 다양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주체성을 정립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나 이외에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다른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존재가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 중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직업일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밥벌이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사실은 현생인류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차이가 없을듯 하다. 과거에 사람은 주로 사냥을 하거나 농작물을 키우면서 밥벌이를 한 반면에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밥벌이를 하게 된다. 인간은 직업을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나가게 된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성공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성공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려면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 속에서 나온 결과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다양한 모습 중 치과의
17년 근무하던 치과에서 임대 연장 불가, 퇴거(나가시라는) 공지를 듣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멍해졌다. 그러나 항상 게으른 나에게 발전의 축복은 변화와 도전을 통해 주어지는 것 같다. 감사하게 성공적으로 인근 새 건물로 이전하였고 이제 반년이 지나간다. 거의 10년 전부터 치과에 신환의 비율은 현저히 낮고 구환 위주로 운영이 되고 있었던 차에 전에 다니시던 분들이 고맙게도 거의 대부분 찾아와 주셨기에, 장소만 변경되었을 뿐, 치과 경영 수입은 거의 평균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옮긴 곳에서도 개원발(?)은 없고 구환 위주로 치과는 돌아간다. 결론적으로 투자는 새로 하였고 이사하느라 수고는 하였지만,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옮기고 달라진 것은 인테리어, 시설이 새것으로 바뀌었고, 치과 이름도 ‘목적이 이끄는 치과’에서 ‘원치윤치과’로 바뀌었다. 바꿨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본인 이름을 걸고 더 진지하고 책임지는 자세로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목적이 이끄는 치과라는 이름을 내 걸었을 때도 물론 동일한 마음가짐이 있었지만 복잡한 마음을 굳이 드러내자면, 남들에게 내어 보이는 것보다 스스로 내실을 더 다지고 싶었다. 신앙은
“치과에 전문과가 있었다고? 그럼 동네치과에선 왜 다 치료하지?”, “우리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약을 열 종류 넘게 드시는데, 왜 치과에선 복용 약을 안 물어볼까?” 국내외 제약회사와 의사를 상대로 조직·인사 컨설팅 20년을 해온 내가, 5년 전 치과 영역 업무를 시작하며 던진 질문 두 가지였다. 당시 전략기획 본부장으로서 임상학술·세미나·기획 전략을 총괄했다. 세미나를 좇아다니며 ‘전신질환과 치과 치료의 관계’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친분 있던 분이 서울대학교 건강증진센터장으로 가면서 “센터에서 가장 많이 보는 질환이 치주염”이라고 사석에서 말해줘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 빨라졌다. 의료 콘텐츠를 만드는 게 내 일이어서 주말마다 연하 장애나 기능의학 관련 학회에 다녔다. 연하 장애나 기능의학 관련 학회에서는 구강건강을 엄청 많이 다루는데, 그럴 때는 ‘왜 이 강의에 연자가 치과의사가 아닐까? 치과의사여야 한다는 개념도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과 학회에 가서 약물 복용과 전신 질환, 그리고 마취 관련 강의를 들으면 ‘이런 강의는 관련 전문의들이 하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물음이 들 때가 많았다. 특히, 레퍼런스가 오래된 경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장산도. 들어본 적도, 미디어에서 접한 적도 없던 이름이었다. 지도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섬이었다. 직전 근무지는 같은 신안군의 안좌도였다. 목포에서 대교 4개를 건너야 닿는 연륙도. 섬이긴 했지만 도로가 이어져 있었고 택배도 가능했다. 이삿짐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불편함은 있지만 불가능은 없던 곳. 그래서였을까? 장산도로 향하던 날 나는 ‘배만 타고 들어가면 비슷하겠지’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큰 오산이었다. 이삿짐센터 차량이 섬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처음, ‘들어간다’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렇게 목포에서 카니발 차량을 빌려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침대, 책상, 컴퓨터, TV 등 큰 짐과 함께 왕복 여러 번의 이사를 시작했다. 하루에 세 번뿐인 배편에 맞춰 차를 실어 날랐고, 섬과 육지를 오가는 이사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렇게 치과의사 한 명, 의사 두 명, 한의사 한 명의 장산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총 네 명이 조용한 섬마을의 유일한 의료인이었다. 장산도에는 병원도, 약국도, 심지어 편의점 하나조차 없었다. 전국 어느 읍내에나 있는 것들이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나는 여전히 치과의사이지만, 한 손에는 익숙한 핸드피스가 아닌 마우스를, 다른 손에는 밀링머신에서 갓 나온 크라운을 들고 있었다. ‘어쩌다 치과의사인 내가 이렇게 디지털을 공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글의 제목, ‘어쩌다 디지털’은 인기 TV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의 축구팀 어쩌다FC에서 착안했다. 한때 최고의 운동선수였던 이들이 은퇴 후 축구를 배우며 엉뚱한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에서 웃음과 공감을 얻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이들이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도전이, 디지털 덴티스트리를 배우며 겪는 우리 치과의사들의 상황과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꼈다. 디지털 기술은 치과에 혁신을 가져왔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본을 뜨고, 석고 모델을 만들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치료를 했다. 그때는 최상의 진료를 제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디지털은 치과의 모든 분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주류가 되어버렸다. 이제 학회에서도, 논문에서도, 환자 상담에서도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한때 아날로그 방식에 능숙했던 뭉쳐야 찬다의 출연진처럼, 낯선 디지털 환경에서
2025년은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아주 뜻깊은 해이다. 지난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는 ‘국민과 함께한 100년, 밝은 미소 100세까지’라는 슬로건 아래, 이를 기념하는 국제종합학술대회 및 치과의료기기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행사는 단순한 축하의 자리를 넘어, 지난 10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향한 비전과 다짐을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해에 100주년 기념 서포터즈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더없이 값진 경험이었으며, 동시에 미래의 치과의사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치과의사협회의 시작은 1925년 일제강점기로, 당시 조선인 치과의사들은 가혹한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정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한성치과의사회를 결성했다. 이는 협회의 뿌리가 되어 이후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치과의료계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적 위기와 시대적 격변 속에서도 치협은 국민의 구강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러한 헌신은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치과의료 선진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데 기여하였다. 치협 100
얼이 깃드는 굴이라는 얼굴은 정신의 형태이자 됨됨이다. 관상(觀相)은 그 사람의 드러남이다. 설명할 수 없는 직감, 그것은 빅데이터 기반의 안면 인식이다. 첫눈에 반함과 이유 없는 싫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결정론자는 아니지만, 얼굴에 시간이 새겨진다는 말엔 공감한다.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오픈 테스트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부터 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더 단단해진다.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뜻하는 명의. 처음 환자와 대면하는 순간 적어도 난 그에게 명의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것도 명의일까? 오진을 할 수도 있다. 굳어진 얼굴은 치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연 없는 얼굴 없다. 환자도 의사의 관상을 본다. 명의 말고 ‘명환’들은 보자마자 안다. 특히 원장님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들까지…심지어 어제 술을 마셨는지도 안다. 나는 훌륭하지 않은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왔을 때의 간극. 나의 최선과 환자의 기대치, 서로 패를 펼쳐야 승패가 갈린다. 다행히 내 거짓말은 잘 먹히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편하다. 내 진심이 잘 전달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최선을 다해도 환자는 간신히 만족할까 말
고려 12세기 말에서 13세기는 무인정권(1170-1270)과 4차례의 몽골침입으로 온 국토가 오탁악세(五濁惡世)와 도탄지경(塗炭地境)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항몽(抗夢) 호국(護國) 호왕(護王) 호불(護佛)하고,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하여 해탈열반(解脫涅槃)과 왕생정토(往生淨土), 성불(成佛)하는 방법을 찾는 전남 지역에 두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보조지눌(1158-1210)과 진각혜심(1178-1234)이 주도한 조계종 수선결사(修禪結社)는 출가자로서 상근기의 학승고승들이 모여서 화두(話頭)와 참선(參禪)을 통한 자력본원(自力本願) 자력신앙을 추구했다. 문수보살의 지혜와 화엄경의 일체심조(一切心造)를 지향하여 돈오정혜(頓悟定慧) 시심시불(是心是佛)로서 상구보리를 추구하였고, 조탑(造塔)보다는 유심(唯心)깨우침이 소중했다. 선원사에서는 소실된 부인사 초조대장경판을 재건하여 불심으로 항몽국책사업인 재조대장경사업(팔만대장경, 1236-1252년)을 주도했다. 또 하나의 집단은 백련사(만덕사)를 중심으로 한 원묘요세(1163-1245)와 진정천책(1206~ )이 주도한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는 중하근기의 범부중생(凡夫衆生)과
계엄, 탄핵, 트럼프 관세 등등 국내외로 요즘 시국이 혼란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더해져서 우리 같은 일반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얘기는 관점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언급하기가 부적절하기도 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때문에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관세의 목적은 “이제 미국에다가 물건을 팔고 싶으면 해외에서 생산해서 수출하지 말고 미국에다가 공장 짓고 직접생산해서 팔아라”는 뜻입니다.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의도이죠.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내륙지역의 제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로서는 당연한 행보일수 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갑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익을 생각하는 쪽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 후에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은 제국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자타공인 세계최고의 패권국입니다. 브레턴우즈협정, IMF, 세계은행,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UN 등 국제질서를 회복하고 통치하는 발상은 이전에 제국주의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
‘Stairway To Heaven - Led Zeppelin’ Best Of The Best. 너무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전성기 시절 -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등 - Led Zeppelin 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라이브 앨범 ‘The Song Remains The Same [1976년 발매, Stairway To Heaven (Live, 1973년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의 대표곡 중 하나. *Studio version은 레드 제플린의 4번째 앨범(Led Zeppelin IV, 1971년)에 수록되어 있다. 멤버들의 난잡한(?) 사생활(마약 투여 등등 / 베이스&건반 - 존 폴 존스 John Paul Jones 제외) 등 논란거리가 매우 매우 많았던 밴드.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아름답고 유명한 불세출의 클래시컬 뮤직(Classical music)을 작곡한 서구 유럽의 고전 음악가들도 그런 이들이 꽤 많았다. 노래만, 그 자체만, 보려고 한다. 이 노래에 대한 논란(?) 거리 중 하나가 노래 제목과 가사의 ‘Heaven’이 과연 ‘천국(Heaven)’이냐 ‘지옥(Hell)’이냐였다.(* Hea
2010년 한국에 막 소개된 열린 시스템의 구강스캐너 iTero 앞에 선 나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당시 아날로그 인상 채득에 익숙했던 내 손은 스캐너 렌즈 앞에서 어색하게 떨렸다. “이게 과연 임상에서 통할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서툰 실력으로 수 차례의 실패 영상 얻기를 거듭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스캔이 완성된 후, 컴퓨터 화면에 완성된 3D 모델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작은 기계가 치의학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해 가을 대전에서 열린 대한치과보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구강스캐너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느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임상 현장에서 디지털 워크플로우를 직접 구축하기 시작했다. CAD-CAM 설계와 3D 프린팅 보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오차 하나하나가 환자 치료 결과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밤새 문헌을 뒤지고 실험을 반복했다. 실패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 과정이 쌓여 임상시험 설계로 이어졌고, 구강스캐너 정확도 검증과 세라믹 3D 프린팅 소재 평가 결과를 SCI급 저널에 발표하는 성과를 이루어냈으며 ‘디지털 치과 전도사’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기술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