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일부와 대초리 일부에 걸쳐 있다. 화순 운주사는 수수께끼의 현장이다.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한 토론회와 현장답사가 진행될 모양이다. 그동안 진행된 학계의 논의는 여전히 신비의 현장 범위를 벗어나지 못 해 왔다. 나는 운주사 물형의 배치는 일부 아마추어들 간에 제기된 묘법연화경(법화경)의 견보탑품의 경전 내용을 표현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경전에 보면 석가모니가 사부대중에게 법화경을 설하니, 큰 우레 소리와 함께 보배탑(석조 불감)이 솟아 나온다. 사부대중은 놀라움과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보배탑의 문을 열어보자고 했다. 세존께서는 보배탑 안에는 오래전에 열반하셔서 선정에 드신 다보여래가 계시는 곳이다. 다보불은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경청하겠다고 서원을 하신 불이다. 세존의 법화경 설법하심을 듣고자 지하에서 공중에 솟아올랐다. 다보여래의 상을 보려면, 시방세계에서 설법하신 모든 분신제불과 수행 중인 보살들이 다 모여야 다보여래를 볼 수가 있다고 세존께서 말씀했다. 그 말따라 솟아오른 보배탑 안의 다보여래를 보려고 모여드는 상황을 운주사는 표현한 것과 일치한다. 세존의 육계에서 광명이 시방세계에 비추자
학교라는 사회에 거의 20여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출근하고 학생들 교육하고 환자분들 진료하고 학교 일을 하고 항상 비슷해 보이는 일상에서 작년부터 보직 맡아서 학교일이 늘어난 것이 약간의 차이입니다. 퇴근하고 집안에 밀린 집안 정리하고, 학교나 학회관련 일로 외부 출장가고 나이 먹어가니 다니는 병원이 늘어났고 글 몇 줄로 적으니 단순하고 간단한 일상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이 안에서 사는 생활은 치열한 전쟁 같습니다. 주당 업무시간 이런 개념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사회가 점점 변함에 따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늘어나고 더 살펴야 하고 더 챙겨야 합니다. 같지만 같지 않은 일상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어느덧 틀에 박힌 일상에 안주하고 나보다는 주변 여건을 더 탓하게 되고 불평이 늘고 다른 분의 어려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타인을 탓하게 되는 내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학교에 처음 들어 올 때 마음 먹었던 것은 사그러지고 나 자신도 없어지고 있었던 거지요. 우리는 치과라는 분야에서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살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전혀 다른 분야를 배우기를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내 자신 되살리기 프로젝트로 차(tea)에 대해 배워야겠다 하고 겁 없이
3년 2개월 간의 군의관 생활을 드디어 마쳤다. 홀가분하면서도 정들었던 군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그동안의 군 생활을 돌아보며 소회를 자문자답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개원가와 사뭇 다른 군대에서의 삶이 독자들에게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1. 본인의 근무지는? 필자는 공군으로 배정받았다. 첫 2개월은 충북 괴산의 육군학생군사학교(속칭 훈련소)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나이 서른 먹고 아침저녁으로 달리기와 체조를 하고, 20kg에 달하는 군장을 메고 산을 오르며 훈련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살이 3kg나 쑥 빠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동시에 제일 건강했던) 중 하나로 기억한다. 그 후 원주 제8전투비행단에서 2년간 복무하였고 서울공항(제15특수임무비행단)에서 남은 1년을 보냈다. 공군 치과 군의관 대다수는 비행단에서 복무한다. 비행단 내 항공의무대대에 치과 진료실이 하나씩 있으며 대부분 치과 군의관 한 명만이 배정된다. 비행기 소리가 커서 좀 불편하지만,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면 가슴에 웅장함(소위 말하는 국뽕)이 차오른다. 2. 공군을 포함하여 요즘 군대 치과는 시설이 어떠한가? 놀랍게도 상당히 준수하다. 외산 근관 모터와 NiTi
지난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열린 세계심미치과연맹(IFED, International Federation of Esthetic Dentistry)의 ‘제13차 World Congress of Esthetic Dentistry’에 참가하기 위해 대한심미치과학회(KAED) 김진환 회장님과 여러 고문님, 임원분들, 우리 보철과 3년차 수련의와 함께 튀르키예 이스탄불로 출발하였다. 15년 전, 치과대학 원내생 시절에 방문했던,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꼭 다시 가고 싶었던 곳이라 큰 기대감으로 11시간의 비행에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스탄불 신공항에 도착하였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고(2018년도에 개항, 연간 2억명 수용, 인천공항의 3.5배, 여의도의 26배라고 한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인천공항에서 자문을 받아 지어졌다고 한다. 신선한 밤공기를 맞으며 학회 장소인 윈덤 그랜드 이스탄불 레벤트 근처의 호텔에 도착했는데, 높은 빌딩들 사이 바로 앞에 너무나 황홀한 모습의 레벤트 모스크(Levent Cami)를 보고 우리는 모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염문섭 부회장님의 핸드폰 사진 잘 찍기 열강을 받고, 뿌옇기만 했던 사진에 모스크 본연의 모습을
누군가 나에게 지난 치과대학 생활을 통 틀어서 가장 인상깊은 에피소드를 하나 꼽으라 한다면 2년 전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조혈모세포 기증 가능하신가요?’ 난데없이 본과 2학년 1쿼터 치주과학 수업중에 받은 연락이었다. 내가 기증등록을 했던가? 아, 기억난다. 6년 전이었나, 강남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헌혈 독려 팻말을 들고있는 봉사자분에 이끌려 헌혈의집을 들어갔었지. 헌혈을 마쳤을 쯤 담당직원분이 조혈모세포 기증등록을 하면 초코과자 한박스를 준다는 말에 혹해 등록을 했고, 그 사실을 여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첫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척추에서 직접 채취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그라신이라는 골수 촉진제를 맞고 말초혈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촉진제를 어떻게 전달받느냐였다. 전주에서 쭉 거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기증센터가 있는 서울 용산으로 매일 올라가기엔 불가능했고, 결국 퀵배송을 통해 3일치 촉진제를 한꺼번에 전달받았다. 기증날짜가 정해지고 난 뒤, 촉진제를 모두 맞고난 다음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졸지에 1인 병실로 감금아닌 감금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수혜자가 기증자의
대한민국 민법상에는 만 19세 이상의 성인을 어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진정한 어른은 숫자로 매겨진 나이와는 별개로 심리적인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거울 속에 비친 저를 바라보면, 성인에 적합한 나이를 가졌음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면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고, 갓 성인이 되었을 적에는 단순히 물질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성공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듯합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종종 예상치 못한 상황들과 시험들이 가득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성인이 되며 받은 ‘자유’와 ‘자격’에 ‘책임’과 ‘대가’가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책임질 수 있는 ‘참된 어른’이 되려면 어떤 행동과 말, 그리고 가치관을 가져야 할지 고민해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가치관을 혼자 만들어 가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또래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주었지만
올해도 다들 벚꽃 구경을 하셨겠지요. 매년 피는 벚꽃은 저희에게 추억을 상기시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갔던 유원지에서 본 벚꽃, 학창시절 수업을 빼먹고 교정으로 여의도로 돌아다니며 보았던 벚꽃, 여자친구네 학교에 가서 보았던 벚꽃 등 수많은 추억들이 벚꽃과 함께 합니다. 애들을 유치원에 등원시키던 어느 날, 흩날리는 벚꽃 잎과 푸른 하늘과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저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작은 꽃봉오리가 다섯장의 꽃잎을 가진 흰 꽃으로 활짝 개화를 하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꽃잎은 눈이 날리듯이 봄비에 날려 떨어집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큰 꿈을 품었던 이립(而立)의 30대를 지나, 불혹(不惑)의 40대를 살아가고 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지천명(知天命)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우리의 삶을 좀더 슬프게 얘기합니다. 돼지 같던 유아기를 지나 양과 같은 청소년기를 거쳐 말과 같이 힘차고 거칠던 청년기를 지나면,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남들의 눈치를 보는 견생(犬生)을 살아가고 자식들이 다 크고 나면 등이 굽어 원숭이 같은 모습이 되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구강악안면외과 수련을 받았지만, 사실 생명을 다룬다는 생각은 없었다. 수련을 마치고 갓 부임한 대학병원에서 이제 스승의 지도 없이 홀로 환자를 보던 지난 일이 생각난다. 전공의 수련기관이 아니었던 병원이었기 때문에, 야간에 응급실 호출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 날도 퇴근 후 밤 11시 경 쯤 콜을 받고 응급실에 나와 안면부 열상환자 수술을 마치고 새벽 1시경 쯤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병원에서 다시 오라는 연락을 받아 차를 돌려 돌아왔는데, 전신에 손상을 입은 30대 후반의 교통사고 환자가 이미 흉부외과 교수와 외과 교수에 의해 전신마취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에게 연락한 이유는 안면부에서의 끊임없는 출혈 때문이었다. 상악골이 분리된 상태로 구강과 코에서 출혈이 지속되고 있었다. 신속히 스크럽을 진행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 수술에 동참했다. 수혈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그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석션의 속도가 출혈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약 20~30분 정도 시간이 경과된 듯했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수술을 하던 흉부외과 교수의 음성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양교수, 이제 그만하세요.” 그렇게 그날의 T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