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52)]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교수 야오 타로(失尾太郞)

2005.09.15 00:00:00

1922년 7월 한여름 오오사카치과의학전문학교(大阪齒科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나는 9월 신학기부터 오노 토라노스케 (小野寅之助) 선생님 조교로 남아 있던 중 해외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성치과의학교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4월10일에 부임했다.


오오사카치과의학전문학교로서는 처음 있는 경우로 동창인 조교들이 신세계에서 송별회를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떠나는 본인에게 연락하는 것을 잊어서 그들만의 연회로 끝났다는 것을 다음날 학교에서 알았다. 또한 오오사카역에 모두 배웅하고 싶다고 하여 미리 약속해 두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만나지 못하였고 모처럼의 기념품도 받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당시 2등 열차로 희망에 부푼 가슴을 안고 귀성했다.


그 후 여름휴가 때 귀국했을 때에 안 일이지만 기념품은 이미 행방불명되었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엇갈리는 일 투성이로 시작되었다.


경성(京城)에 도착한 첫날밤은 하세카와쵸(長谷川町)의 비젠야(備前屋)에서 지냈다. 다음날 학교 방문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총독부 병원을 방문했으나 어디에 학교가 있는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차에 제1회 졸업생인 이군(李君)에게 발견되어 겨우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후 요시나가 테이(吉永貞) 선생의 안내로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선생에게 소개되었다. 이어서 시가 키요시(志賀潔) 병원장을 만날 수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세계적인 학자인 시가 키요시 선생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젊은 혈기 탓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 때 오오사카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있을 때 병리학을 배운 나가사와 시게루(長澤盛) 선생이 친척이고 게다가 대단한 수재라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었다.


그 후 학교의 모든 직원인 보철의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국어와 사무전반을 떠맡고 계시는 요시나가 테이에게 다시 소개되었다. 사무실이라고 하는 곳은 병리해부교실의 시체저장실을 개조한 것으로 그 날부터 좁은 방에 3명이 반년정도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시료(施療)의 외래진찰실 방 하나를 배정 받아 연구실과 교수실을 만들 수 있었는데, 치과의학교 교원으로서는 조금이나마 사치스런 방에 자리하게 되었다.


당시는 교원이 적어 나는 치과조직(齒科組織), 계속가공(繼續架工), 여기다 조직학(組織學)과 치과병리학(齒科病理學)을 강의했다. 이러한 상태로 부임 초부터 상당히 바쁜 나날과 언제나 긴장된 생활에 젖어 있었지만 행복 그 자체였다. 하세카와쵸(長谷川町)로 이사를 한 후 치과해부(齒科解剖), 치과병리(齒科病理), 치과약치학(齒科藥治學)은 전문으로, 그 외에 여러가지 과목을 일시적으로 담당하기도 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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