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73)]파고다

2006.03.09 00:00:00

 

파고다
종로에 파고다공원이 있다. 공원답지 않은 작은 공원으로 시설도 심은 것도 볼 것이 없고 경내도 좁은데, 제일 안쪽에 하얀 대리석의 훌륭한 12층 탑이 있어 이곳의 막연한 산책은 그것을 보기 위함이었다. 파고다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페르시아어의 ‘파고데’에서 나온 것으로 우상을 섬기는 사원의 뜻에서 바뀐 것이다.


인도에서 파고다는 주로 불사리(부처의 유골)를 안치한 탑이었고 일본에서도 불사리 탑으로 만인의 참배를 받아 각지에 있다. 옛날 불교 국이었던 조선 지금은 거의 보는 사람 없고, 그 하얀 대리석탑의 아래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현존하고 있을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가지고 돌아가겠다고 하여 최상부를 지상에 내려놓았는데, 너무 무거워서 그만 두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그대로 땅위에 있고, 4각의 1각에 작은 파손 장소가 있다.
동대문과 이 파고다라고 하는 훌륭한 중요문화재,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토 기요마사의 전설은 진실인가 주의해서 조사해 보았으나 불분명했다. 하얀 대리석탑에는 아마도 생의 끝까지 나의 뇌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낙서
낡은 수첩을 한장 한장 넘겼다. 잡다하게 여러 가지 일이 쓰여 있다. 이완용, 광화문 464, 광화문 1417이라고 전화번호가 있다.
‘이완용(李完用)’이라고 하면 일본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한일합방 때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후작으로 칭함 받고 있었다.
그 손자로 이어져 후작이 된 이병길(李丙吉)에 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도쿄(東京)우시고메 야라이쵸 토미다의 집에서 이병길이 몸을 의지하며 학습원에 통학하고 있었다. 소학교부터 일본에서 교육받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토미다의 집에 친척관계로 친우, 지금은 의제가 된 도쿠히사(德久)도 기숙하여 대학에 통학하고 있었으므로 자주 놀러가서 옆방의 이병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는 사이라 해도 연령의 차이로 캐치볼의 상대가 되거나 공기총으로 참새를 쏘러 데려가는 정도였다.


1925년(다이쇼14년)의 여름 오카다 시로는 도쿠히사가 경성에 왔을 때 엽서로 이곳에 놀러오라는 것으로 이완용의 붉은 벽돌의 넓은 저택이 있는 광화문을 방문했다.
돌문을 들어서자 청원순사의 질문 세례다. 이것으로 상당히 마음이 꺼림칙했다. 현관에서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노인이 4∼5명 있었다. 이병길은 별채에 있다고 하여 별 반응이 없다. 어의가 없었다. 원래 야인인 나는 권문에 알랑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 후 전화가 와도 가지 않았다. 전화로 이야기할 뿐이다.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선생 댁에는 확실히 이완용이 쓴 액자가 걸려있었다. ‘기여 신(技如神)’. 오카다 타다시 대형이라고 써 있는데 지인을 통해 부탁하여 써주었다는 것이었다.
‘국적 이완용을 죽여라.’
‘이완용에게 천벌을 내려라.’
‘일본의 바보.’라고. 이것은 가두의 화장실에서 본 낙서이다.
국민감정의 진수(眞髓)에 마주쳐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지만 천수를 다했다는 것을 신문에서 알았고 후작이 된 이병길은 도쿄에서 계속 자유의 공기를 사랑했겠지만 생활의 본거를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른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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