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80)]호리 타께시(堀武)의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추억 (상)

2006.04.27 00:00:00

호리 타께시(堀武)는 카키미 요죠(垣見庸三) 선생의 경성부임 송별회를 한 수일 후 시마미네 토오루(島峯徹) 선생으로부터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 먼 곳으로 안됐다.”고 동정하던 그 때였으므로 놀랐다. 조선이나 경성은 바다를 건너 훨씬 저쪽의 세계이고, 치과계의 일이라곤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선생, 이꾸다 싱호(生田信保), 이마무라(今村) 등의 학술논문을 읽을 정도였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일은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호리 타께시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부임해서 처음은 일본 정서가 많이 있으므로 완전한 타향에 온 느낌은 아니었다. 조금 익숙해져보니 조선인의 풍속 습관과 슬럼가, 부르는 소리의 조선어 등에서 조선 의식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있는 동안에 그것도 익숙해졌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조촐하고 아담하여 상당히 정돈된 훌륭한 건물로 안심했다. 그 이유는 바로 전날까지 재직한 토쿄오고등치의학교(지금의 도쿄의과치과대학)는 병원, 교실, 실습실도 완전한 가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실, 실습실은 단지 2개씩으로 개교 당시라 해도 지금의 치과대학 설치 기준에서라면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학교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바라본 경성의 학교는 훌륭한 것이었다.


설비는 당시 학생이 발로 밟는 엔진을 능숙하게 밟고 있었다. 때문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임상전문인 우리들 교수의 연구기관으로도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연구에 대해서는 나기라 다쓰미 선생으로부터 그 성적을 독촉하실 정도로 이해와 열의가 있었고, 관대하기도 하여 여가만 있으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옛날의 과학자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훌륭한 법칙을 확립한 시대에는 현대와 같은 완비된 설비는 없었을 것이고, 제약 없이 그저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치과의사로 학위를 획득하는 것도 힘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잇따라 각 교수들이 이 영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나기라 다쓰미 선생의 열의 덕택으로 선생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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