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91)]경성치의학교 모자

2006.07.20 00:00:00

1922년 9월 16일 제복은 제정 인가되었다. 모자는 둥근 모자는 허용되나 각진 모자는 안 된다고 했다. 또는 모자는 각진 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의견이 상당했었다.


각진 모자는 당시 의학전문학교의 교실을 빌렸던 관계로 서로 혼동되기 쉽다 하여 둥근모자로 해야 된다고 하여 만들었다. 모장(帽章)은 재학생 중에서 여러 가지를 모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영어를 좋아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무턱대고 영어를 넣은 모장으로 하고 싶다. 그것도 당시 재학생들도 여러 가지로 좀더 좋은 모장은 없을까 하는 말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그 당시 태평로에 있었던 조선미술품제작소 도안계 사람과 많이 연구하여 만들었다. 도안은 자랑이 아니지만 상당히 훌륭한 모장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모자 기장을 파는 공방에게 물어봐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모장은 대단히 좋다”고 지금도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장에 한자를 써서 표한 것은 대단한 선견이 있었지 않았나 한다. 그 당시의 모장은 ‘치의(齒醫)’가 적혀있는 것이다.

 

경성치과의학교와 총독부의원
5000원 정도의 경비를 가지고 1년의 예산을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몹시 부족하였다. 스토브의 문제로 생각이 났는데, 석탄을 조금씩 학교에서 사서 총독부 의원의 석탄처치장 안에 같이 던져 넣어 두고 쓰는 것은 같이 썼다. 석탄은 빌려오는 것이 불가능해 병원의 것을 사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주는 상태였다. 덕택에 경비가 많이 충당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외에 여러 서류의 종이나 등사판의 잉크도 학교에 비품이 없어서 총독부 의원에서 빌려오라고 해서 빌려 썼다. 이것은 시가 키요시(志賀潔)를 비롯해 요시다 야고에몬 등의 숨겨진 원조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경제는 지금 말한대로 작은 것이지만, 사용자 측에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특히 학교의 사무 책임을 교장이 요시다 야고에몬에게 맡겼기 때문에 처리는 전부 그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외에 소모품도 병원에 많이 있어 조금씩 받아오는 식으로 병원과 치과의학교와 혼합 사무와 같이 되었다. 따라서 학생에 대해서도 병원의 직원은 자신의 학생이 온 것과 같이 생각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병원 직원과 모든 면에서 관계있는 교장과 내가 모든 일에 관련돼 있었으므로 이런 저런 소리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뒤에서는 여러 다른 논리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것은 괜한 시기였다. 치과의사양성이라는 대세로 어떻게든 총독부 의원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병원의 학생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 점이 학교의 향상 발전에 힘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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