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95)]경성치과의학교 임상실습

2006.08.24 00:00:00

1924년 4월 경성치과의학교 임상실습은 총독부의 이비과의 진료실의 일부를 빌려 시작했다. 이것은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부재중에 일이었다. 1923년 10월 1일 나기라 다쓰미는 고베(神戶)를 떠나 배로 서양 여행을 다니고 1924년 6월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경성치과의학교 임상실습은 의학전문학교 시료 담당에서 먼저 도움을 주었다. 시료환자용 기계 2대를 빌려 썼고 보철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보철을 희망하는 사람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하루의 수입이 100원 정도가 된 경우도 있었다. 환자는 학생에게 할당됐고, 학생이 환자를 데리고 왔다.
“부속의원을 어디에 만들까?”


야오 타로(失尾太郞)와 요시다 야고에몬(吉田彌五右衛門)은 사무관의 도움을 받아 이비과의 진료실 일부를 빌리고, 부속의원을 야기(八木)치과상점 치료의자 3대로 시작했다. 그 때 토미다 기사구(富田儀作)는 황금정 1번지에 있었다. 수차례 토미다 기사구의 집에도 갔었고, 그 사이 다소 돈도 받아놓지 않으면 안 됐다.
오카다 시로(岡田四郞)가 부속의원의 주임으로 부임했다. 기공실은 그 아래편에 야오 타로의 연구실를 사용했다. 그 방에 있던 2대의 연구대는 기공대가 됐다. 하루 5명이나 10명 정도 치료를 했다. 금관보다도 의치가 많았던 것 같았다.


병원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많이 나왔다. 학생 쪽에서 보면 불만족뿐이고 경영하는 쪽에서 보면 대단한 고충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좁고 부자유해서 대개 반이 나오면 반은 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자는 목조의 아주 낡은 것이고 여러 가지 불편으로 빨리 병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됐다. 치료실습계획안은 환자에게 열심으로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환자들을 야오 타로도 치료하고 오카다 타다시(岡田正)도 물론 치료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조임을 당했다. 해야 되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야오 타로에게 밀고 나면 나중에 조임을 당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1924년 5월 26일 이사 때에 승강의자가 설치됐다.
교장이 없는 중에는 문제를 만들면 안 되고 만족스럽게 교장에게 인계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사이에 고민이 많았다. 오카다 타다시, 야오 타로, 모든 직원이 일치협력해서, 어떤 마찰 없이 일사불란하게 단지 학교를 위해 바치자는 정신이 대단했다는 것이 난국을 돌파하는 원인이었지 않았는가 한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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