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론/강신익]‘어짊’과 ‘미쁨’의 인간학

  • 등록 2004.06.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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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역동성’을 꼽는다. 남들이 수백 년 동안 힘들여 쌓아온 근대화의 성과를 우리는 불과 수십 년에 압축해 이뤄냈으며, 구제금융이라는 위기 상황을 모두가 합심해 극복해 냈다. 아무도 꿈꾸지 않던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일궈냈으며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운 질서정연한 응원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놓고는 불과 1년 만에 몰아내는가 싶더니 다시 역풍이 몰아쳐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이러한 역동성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역동성은 갖가지 사회현상에서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난다. 여당과 야당, 노동자와 사용자, 의사와 정부, 개발론자와 환경론자 사이의 투쟁과 갈등은 이제 진부한 일상이 돼 버렸다.


이 같은 첨예한 갈등의 양상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녹아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죽이기’로 표현되고 선거에 쓰이는 자금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실탄’으로 비유되며 국민이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는 선거마저도 전쟁(선거전)으로 불린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본업인 어떤 의사가 쓴 책은 제목부터가 전투적이며 살인적이다. ‘의사를 죽여서~’, ‘공자가 죽어야~’, ‘마누라 죽이기’, ‘교회가 죽어야~’ 등 ‘죽이기’의 목록은 끝이 없다. 대결과 투쟁이 일상적 삶의 양식이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대결과 투쟁의 문화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업인 우리 의료인의 의식 속에도 엄연히 살아 숨쉰다. 질병은 몰아내야 할 적이고 세균과 바이러스는 죽여 없애야 할 대상이다. 생명은 함께 가꾸어야 할 가치이기보다는 외부의 침해로부터 지켜내야 할 재산이며 권리다. 의학은 과학적 사실들의 모음이며 변덕스런 인간의 정서를 반영하는 가치나 윤리와는 구분되는 가장 보편적 지식체계다. 그래서 윤리는 언제나 과학의 발목을 잡는 거추장스런 동반자나 장식물로 여겨지고, 과학과 윤리는 대립의 구도 속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 속에는 전투적 생존본능 외에도 윤리를 고리타분한 선비의 뜬금없는 훈계 정도로 여기는 무지와 오해가 숨어있다. 최소한의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는 인간적 가치의 실현과정이었으며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규범과 윤리를 발전시켜온 발자취임을 안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살지 못함을 제도의 탓으로 돌리거나 윤리의 실현이 우리의 이익과 대립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뒷걸음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도 반하는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윤리는, 역사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회적 합의구조이다. 그 합의를 이루는 과정은 지루하고 답답할 수도 있고 때로는 격한 투쟁을 동반할 수도 있다. (4년 전 의사의 파업을 생각하자.) 하지만 그렇게 극적인 역동성은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해야만 진정한 힘과 뜻을 가진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의술은 인술(仁術)이라고 한다. 인(仁)은 ‘어짊’이다. 나의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은 상대방에게 미쁘고 미더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격렬한 토론과 투쟁의 역동적 과정 속에서도 이 ‘어짊’과 ‘미쁨’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인간의 어질고 미쁜 마음들로 짜여진 피륙이며 윤리학은 이 마음들의 구조를 탐구하는 인간학이다. 의학 또한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앎의 구조이며 인간학이다. 의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을 돕는데 있다면 마음들의 짜임새를 탐구하는 윤리학이야말로 가장 본래적인 의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 치과대학들은 어째서 윤리학을 가르치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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