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 왔다. 특히 일제가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정치적 변란을 침략의 계기로 악용하고,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해 한국 내에서의 정치·경제·군사적 침략을 강화하면서 일본인은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개항장을 중심으로 거주가 증가되었다. 1893년 6월경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약 1천명이었고, 1894년 1월 일본인은 4000명을 육박하고 있었다.
노다 오지(野田應治, 1871-1930)는 1893년 7월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개업했다. 그는 한국에는 정규의 근대치의학 교육을 받은 치과의사가 없음을 알고 치과의사가 되길 결심했다. 1891년 일본 유일의 치의학교인 다까야마(高山)치과의학원(現 東京齒大)에 입학하였다. 1893년 5월 일본 내무성 치과의술개업시험에 합격해 치과의사 면허장을 받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서울로 옮겨 개업했다. 당시 서울 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수는 약 5백 명 정도였다. 노다 오지 치과의원 주위는 모두 한국인 주택이었고 더욱이 2층 건물이었기에, 한국인들의 투석 대상이 됐다. 특히 그가 개업한 시기가 일제가 한국 내정에 적극 개입해 갑오왜란을 일으켜 김홍집 내각을 세우고, 친일 개화정책을 수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따라서 병원을 계속 운영하기 어려워 몇 달 만에 일본인 거주지인 진고개로 다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노다 오지는 치과를 개업했지만, 환자들이 무엇을 진료하는지 알지 못하고 병원에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료소 입구에 진열장을 마련하고 치과에 취급되는 각종 치과 치료와 관련된 그림이나 보철물을 전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돼 이후 간판에 총의치의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 되기도 했다.
노다 오지는 1896년 친위대 병졸모집 때에 구강 검사를 실시했다. 이때 한국인들의 구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국인 응모자 1백 명 가운데 충치를 가진 자는 단지 17명뿐이었고 치아가 1~2개 손실된 사람이 11명, 매독으로 치아가 이상이 있는 자가 3명이었다. 조사 대상자의 연령은 18~30세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소금을 이용해 습관적으로 치아를 잘 닦고, 중류 이하의 사람이라도 식후에는 함수(含嗽)하는 습관이 있는 까닭에 충치는 극히 적었다고 했다.
노다 오지는 총의치·국부의치·금관·가교의치와 같은 보철, 치수 치료·충전 등 보존 분야, 발치와 같은 구강외과도 진료하고 있었다. 총의치는 고무상의치를 제작하고 있었고, 보존치료에서는 아말감충전 뿐만 아니라 금을 이용하는 금박충전을 하기도 했다. 마취는 푸로카인으로 시술 직전에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때문에 “푸로카인 쇼크”로 생명의 위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보철을 할 경우, 한국인은 금으로 보철하는 것을 기피하였기 때문에 대개 의치의 크라스프는 백금을 사용했다. 의치를 장착한 사람도 의치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노다 오지는 일본 육군의 허락을 받아 자비로 종군했다. 그 기간은 약 1년이었고, 치료한 환자 수는 5천명에 이르렀다. 1909년부터 일본인 초등학교 학생 구강 검사를 시작했다. 또한 교사와 학부형 및 학생에게도 구강 위생 강연을 매년 1회 이상 실시했다. 그로부터 서울에서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학교 치과보건사업이 실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그는 일본인으로 조직된 경성치과의사회의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