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원장의東醫寶鑑 이야기 1

2009.10.15 00:00:00

이병태 원장의東醫寶鑑 이야기 1

 


세계서 솟아오른 東醫寶鑑


동의보감이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으로 됐다. 우리나라(韓國)에서는 일곱 번째이지만 의학 관련 문헌으로는 세계에서 처음이다. 그동안 1997년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2001년 승정원일기, 직지심경, 2007년 조선왕조의궤, 해인사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경판을 유네스코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국은 지정 숫자로는 세계에서 여섯째이고 아시아에서는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다.


필자는 지난날 20년이 넘도록 한 두 치과대학에서 치과의사학history of dentistry강의를 하였다. 한 학기 13시간 중 10~15분 정도를 《東醫寶鑑》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강의라기보다는 수박 겉핥기식의 소개를 하면서 아쉬움과 그 아쉬움이 부풀어 한탄(恨歎)에 빠지곤 하였다. 그럴 때 마다 핏줄을 내려준 선학들의 위업을 이렇게 모르고 지내서야 되겠는가 하는 통념(痛念)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였다. 세계기록유산은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東醫寶鑑》이 있어서 대단한 자랑이었다. 그 《東醫寶鑑》에 관하여 저자 허준은 누구이며 그 출간 배경과 여러 가지를 알아보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이다. 그리고 치의학적 접근도 챙겨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동의(東醫)


오늘의 중국은 옛부터 하夏→은殷→주周→진秦→한漢→수隋→당唐→송宋→명明→청淸→중국中華人民共和國을 거친 큰 대륙국가이다. 언제부터인지 중국은 중화(中華)를 주장했다. 황하(黃河)와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그들은 중원(中原)이라하였다. 의술에 관해 황하를 기준삼아 남쪽은 남의(南醫), 북쪽은 북의(北醫), 서쪽은 서의(西醫), 동쪽은 동의(東醫)라 하였다. 현재 지리적 개념으로 남쪽은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북쪽은 몽골 러시아. 서쪽은 유럽, 동쪽은 서해바다를 건너 해동(海東)에 있다하여 우리나라(韓國)를 가리켰다.

 

보감(寶鑑)


보감은 매우 귀중한 본보기가 될만한 일이나 물건 또는 그러한 것들을 적은 책새우리말 큰사전. 신기철이다. 즉 요점, 진수眞髓만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태의(太醫)


오늘에 맞는 정확한 직책 직위 명칭을 쓰기는 어렵다. 시의(侍醫) 어의(御醫) 전의(典醫) 내의(內醫) 등 고려때부터 임금을 보살피는 의사이다. 쉽게 오늘 우리들의 잣대로 표현하자면 대통령 주치의 또는 주치의팀 (각 과별)이라 할 수 있다. 영어로는 Royal physician, Imperial physician, Presidential dentist라고 할 수 있다. 허준은 태의였다.

 

태의(太醫) 허준(許晙)과 《東醫寶鑑》


허준(許晙)은 1564년 4월 15일 경기도 김포시 양천면, 현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륜(許  )  과 어머니 孫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허준이 자란 곳은 경남 산청(山淸)이지만 서자(庶子)라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겨낸 불굴의 집념을 가진 의학자였다.

 

출생의 恨을 넘고


유의태(柳義泰)에게 사사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조선 제14대 선조 7(1574)년 의과에 등과하여 다음해 30세에 내의원(內醫院) 의관이 되었다.
내의원에 봉직하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 명성을 떨쳤다. 선조 23(1590)년 가자(加資)-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란 품계-를 받았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義州)를 다녀와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선조 34(1601)년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이어서 선조 37(1604)년 충근정양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이 되어 양평군(楊平君)에 봉해지고 승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이때 사간헌과 사헌부에서 허준의 출신 성분을 들어 가자를 개정할 것을 주장해서 보류됐다가 허준이 죽은뒤에 다시 추증됐다. 일설에는 반납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선조 29(1596)년에 《東醫寶鑑》편수 명(命)을 받고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이듬해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을 일으켜 왜장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가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처들어 왔다.
이에 함께 작업하던 여섯 사람 허준(許晙), 정작(鄭    ),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들 중 다섯 명은 태의(太醫)였고 정작만이 유의(儒醫)였다. 1598년 선조는 허준에게 단독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선조 죽자 삭탈관직


1608년 선조가 죽고 제15대 광해주가 즉위하자 허준은 어의로서 책임을 못했다하여 파직당하고 성문밖으로 추방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듬해 광해주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각고 끝에 광해군 2(1610)년에 편찬 작업을 완료하고 3년 뒤인 광해군 5(161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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