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론-신순희] 현대인의 가을

2009.11.16 00:00:00

월요 시론


신순희 <본지 집필위원>


현대인의 가을

 

가을이 벌써 떠나가려고 한다.
지난 가을비에 단풍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기온마저 뚝 떨어져 벌써 장갑을 꺼내야하는 건가 하릴없이 고민이다. 어느 신문 문화면에서 읽은 “가을, 널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데…”가 아직 내 심정인데, 장갑을 끼는 순간 겨울을 인정하는 것 같아 쌀쌀한 아침기온에도 곱은 손을 입으로 호호 불며 버티고 있다. 단풍은 떨어져버렸어도 아직 밟을 낙엽이 있다면 가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직업마저 3차 산업에 종사하는 나에게 가을은 늘 감성의 영역이다. 올 초 부모님이 농사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분가해서 살지만 맞벌이 자식들을 걱정해 자주 집에 다녀가시던 부모님들의 발길이 올 봄부터 뜸해지신 것과 아는 분 야산에 텃밭을 만드셨다는 말씀 사이의 상관관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나는, 얼마 전 다녀온 그 텃밭(!)을 보고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베란다의 상추모종과 옥상의 방울토마토쯤을 상상하던 내게 산자락 가득 펼쳐진 배추밭, 무밭, 고구마가 그득 묻힌 이랑들과 콩, 깨, 옥수수, 고추 심지어 생강에 토란까지 주렁주렁 열려있는 그곳은 단순한 서울근교 야산을 넘어선 ‘농촌’ 그 자체였다. 덕분에 추석에는 직접 따온 토란으로 국을 끓였고 따서 말린 고춧가루와 무로 물김치를 담가 핸드메이드 콩 송편과 함께 차례상을 올렸다. 그리고 조만간 수확할 배추로는 대규모 김장을 담그게 될 것 같다.

 

그렇다. 진짜 가을이란 수확의 계절이다. 아주 오랜 옛날 인류가 농사를 시작하던 때부터, 물론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지역의 문화는 달랐을지 몰라도, 가을은 땀 흘린 시간의 수고를 기쁨으로 거두는 계절이었다. 봄부터 종로의 종묘골목을 다니시며 종자를 사셨고, 거름을 주고 밭을 갈고 일일이 세워주고 묶어주며 자식같이 돌보신 부모님은, 당연히 종자값, 비료값, 교통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의 수확물을 바라보시면서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고 기뻐하셨다.


자식농사라고 했던가. 사람이든 식물이든 정성과 땀으로 가꾸고 키워내는 것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노동이자 가치있는 생산 활동이 분명하다.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거의 매일 다니시며 “하루도 안 가보면 궁금해서 잠이 안 온다”시던 부모님은 텃밭의 새로운 자식들과 사랑에 빠져 행복해 보이셨다. 따가운 가을볕에 하루 종일 고구마를 캐고 짊어 나르느라 다음날 치과에서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엔 기미마저 언뜻 비쳤지만, 어느 일요일 수확의 기쁨을 함께한 나는 감성이 아닌 육체로, 머리가 아닌 팔다리로 처음 가을을 느껴 보았고 농부의 마음도 조금 엿보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 들녘의 쌀농사가 풍년이라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노동에 종사하시는 농민들의 기쁨이 커야겠으나 최근 들리는 소식이 그렇지만은 않다. 과도한 쌀재고에 풍년까지 더해 쌀값이 폭락 수준이라니 농사로 생계를 이어야하는 농민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닐 듯싶다. 그런데도 WTO 쌀협상 때문에 외국쌀 의무수입량은 늘어만 가고 북한에 지원하는 식량조차도 수입 옥수수로 충당한다니 자식같은 벼를 갈아엎거나 쌓아놓고 시위하는 그 분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고즈넉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한 농민의 삶이라도 이렇게 세계정세나 국내정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상황인가 보다.

 

치과계라고 다를까. 조만간 ‘비급여수가고지제’가 시행되면 치과의원에 식당메뉴판이 걸릴 것도 같고, 보철 수가의 심한 하락으로 심지어 치과대학 미달사태가 속출하는 이웃 일본의 상황도 먼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농부건 치과의사건 이 가을을 낙엽만으로 기억하는 건 현대인에게 이제 불가능한 꿈인가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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