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론] 김할머니의 죽음

2010.01.18 00:00:00

김할머니의 죽음

 

 

월요 시론

신순희 <본지 집필위원>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존엄사에 대한 공개논쟁을 불러왔던 김할머니가 지난해 6월 인공호흡기를 떼고 나서 201일간 생존하다가 새해가 밝은지 열흘만인 10일 오후 2시 57분, 별세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며 온 국민의 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내셨던 분은,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 날씨가 잠시 풀린 어느 일요일 오후에, 가족들 곁에서 임종을 맞았다.


혹자는 나름대로 김 할머니에서 비롯된 연명치료 중단 논란이 우리 사회에 연명치료에 대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지는 긍정적 성과를 냈다고도 하고, 일각에는 여전히 존엄사란 인간의 의술로 일단 살려 놓을 수 있는 이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1997년, 보호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회생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퇴원시킨 의사에게 2004년, 대법원이 ‘살인방조죄’를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한 ‘보라매 병원 사건’에 비하면 존엄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이미 많이 성숙했음을 느낄 수 있다. 존엄사 논쟁도 낙태나 사형제도처럼 생명의 존귀함과 경합하는 인권에 대한 철학에 기반하므로 정답이 쉽게 있을 수는 없을 터, 한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도록 건강한 논쟁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일반적인 논쟁의 틀 외에 김할머니의 죽음이 우리 의료인들에게 던지는 각성의 계기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할머니는 2008년 2월15일, 세브란스병원 입원에 입원해 3일후인 18일, 폐 조직검사 중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연명치료 중단 판결에 따라 2009년 6월 23일, 호흡기를 제거하였으나 한 두시간 안에 사망하리라던 의료진의 예상을 깨고 201일간 자가호흡을 이어갔다.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가 쉽게 망각하기 쉬운 한가지 사실 즉, 의학적 예측이란 통계에 기반한 평균 확률일 뿐 생명의 신비로움을 속단하기엔 너무나 보잘것 없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일례가 아닐 수 없다. 폐 조직검사 중 의식불명에 빠질 가능성도, 호흡기 제거 후 201일간 자가호흡을 이어갈 가능성도, evidence-base한 과학적 근거에 의하면 정규분포 곡선을 벗어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겠으나 한 개인에게는 오로지 그것이 인생이며 의료행위란 언제나 놀라운 생명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엄중히 일깨우고 있다.


평균을 벗어나는 경우는 언제나 평균보다 많은 것 같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치아가 살아나기도 하고, 아주 간단한 경우의 신경치료가 끝내 실패하기도 하며 때로는 도저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통증으로 고민하기도 하고, 최근 보편화된 임플랜트 수술시의 수많은 변수들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진료실은 다양한 변수의 현장이 아닐까 싶다.


치열한 진료의 현장에서 오늘도 우리는 환자 개개인의 생명력과 마주대한다. 과학적 기반에 대한 신뢰를 갖되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존엄한 생명에 대한 겸허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질병만을 다루는 작은 의사(小醫)를 벗어나 적어도 사람을 바라보는 보통의사(中醫)라도 되려면 평균에 기반해 진료에 임하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력에 대한 경외심과 그로인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예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논란의 중심에서 의학적 예측을 보란듯이 뛰어 넘으며 201일간 놀라운 생명의 힘을 보여준 김할머니의 영면을 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이 유난히 가슴을 울리는 날이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신순희 본지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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