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론/ 꿈꾸는 소녀-김연아와의 동거를 추억함

2010.03.15 00:00:00

월요 시론

신순희 <본지 집필위원>

 

꿈꾸는 소녀
-김연아와의 동거를 추억함

 

한 소녀를 보았다. 하얗고 가냘프고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그러나 강단있는 눈빛의 소녀를. 처음에는 발레리나인 줄 알았고 운동을 한다 길래 체조선수인가 했었다.
2006년 여름, 남편의 배려로 잠시 병원을 접고 친정식구들과 캐나다를 일주여행을 한 적이 있다. 서부 끝 빅토리아에서 시작한 여행이 밴쿠버를 지나 록키를 넘어 토론토에 이르렀을 때쯤 우리 가족은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토론토 변두리의 저렴한 한인 민박집에 머물기로 했었다. 그 집에는 정말 다양한 한국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 같은 여행자는 물론이요 아이들 조기유학을 위해 잠시 다니러 온 부모, 막 이민을 와서 미처 집을 구하지 못한 초보 이민자들, 이민 후 사업실패로 집을 날리게 된 사업가까지 사연은 다양할망정 하나같이 저렴한 주거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잠시의 동거를 하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소녀가 엄마와 단 둘이 머물고 있었다. 민박집 주인은 “한국에서는 그래도 전국체전에서 1등 하는 실력”이라 평했고, 옆방 사람은 “2층 넓은 방에 있다가 경제사정 때문인지 1층 문간방으로 옮겼다”고 귀뜸했다.
짐작하신바 대로 그 소녀가 바로 토론토에서 훈련 중이던 고등학교 1학년의 김연아 선수였다. 당시만 해도 유망주정도였기에 나는 김 선수를 잘 몰랐고 그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낯선 종목(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전망 없을 것 같은 종목)을 하느라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동포학생정도로 여겼다. 훈련 스케줄도 바빴겠지만 교정장치까지 착용한 10대 소녀가 말수 없는 건 당연지사겠으나 또래에 비해 유난히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우리가 열흘 정도 민박집에 머물면서 토론토 관광을 하는 동안 김 선수를 몇 번 보았는데 밥 먹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어서 어느 저녁, “밥은 먹었냐?”고 물었더니 “네, 샐러드 먹으면 되요”하며 당근을 가지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최고의 금메달리스트이자 지금 대한민국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 김연아는, 불과 4년 전만해도 토론토 변두리 민박집의 작은 방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불안감과 싸워나가던 어린 소녀였다. 지금은 300개 이상의 유수한 기업들이 김 선수와 함께 일하고 싶어 줄섰다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스폰서 한곳이 없어 숙소는 물론 훈련장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루도 훈련을 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북유럽 국가나 선진국만 메달을 딴다는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올린 훌륭한 성적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인가 싶기도 하고, 국가대표라는 짐을 살짝 넘어 스포츠를 즐기는 듯한 88세대의 탄생이 우리 사회의 신선한 변화를 예고하는 듯하여 즐겁다. 그러나 오늘 화려한 나비로 날아오르기까지 마치 누에고치만큼의 긴 어제를 견딘 소녀를 과거 잠시 마주쳤던 나는 감히 증언하건대, 어느 세대이건 얼마나 선진국이 되건 꿈꾸는 자가 흘리는 땀방울은 변함없이 필요하고 꿈꾸는 자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김 선수가 결국 이루어낸 오늘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지만 혹 김 선수가 지금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더라도 토론토에서 보았던 꿈꾸던 소녀는 그 자체로 빛나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운 좋게도 아름다운 거위의 비상을 위한 날갯짓을 잠시 바라보았던 목격담으로 전하고 싶다.


이제는 국민스타가 된 김 선수가 얼마 전 TV방송에서 “거위의 꿈”을 불렀을 때 나는 노래 속에서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사뿐히 걸어다니던 조용한 16살 소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그렇게 빛났던가보다.
용감하게도 세계 제패의 꿈을 꾸고 남들이 반신반의하며 갸웃거리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 현실로 만들어낸 그 소녀가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용기가, 그 땀방울이, 혹 고뇌로 흔들렸을 마음까지도, 참으로 그리운 기억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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