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시장의 유연성

2010.03.22 00:00:00

월요 시론

 김신 <본지 집필위원>

 

 

의료시장의 유연성


 국제학회에서 우연히 만나 안부 교환 수준으로 알고 있는 유럽의 치과대학 교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재직해 왔던 치과대학이 폐쇄되는 바람에 옮겨갈 다른 치과대학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유럽에서는 상당수 치과대학과 병원이 학부교육 과정은 폐쇄하고 진료, 연구, 또는 advanced course의 교육기관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네 생각으로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날벼락 같은 일일 터인데, 그는 오히려 담담하였다. 더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다.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에게서 대학 폐쇄의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식이나 억울함의 기색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매스컴을 통하여 우리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Labor flexibility)이라는 용어를 익히 들어왔다. 이것은 외부 환경변화에 인적 자원이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배분 또는 재배분 되는 노동시장의 잠재력 또는 그 가능성을 의미하는 경제용어이다.


기업주는 원하면 언제든지 기업의 몸집을 키웠다 줄였다 할 수 있어야 경제적 상황의 변화, 특히 위기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그래서 노동 유연성은 기업주의 지속적인 투자 확대, 외자의 유치에 필수요건으로 꼽힌다. 반면,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유연성이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를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에 노동의 유연성 보다는 안정성을 요구하면서 유연성을 확대하려는 정부정책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많다.


치과계의 경우를 돌아보자. 사실 치과의사는 전문직종이고 대다수가 자유 개업의이기 때문에 위의 경제논리에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는 치과의료시장도 그 인력수급에 있어서 유연성을 구비하고 있어야 시장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 유연성을 잃은 경직된 시장에서는 의료의 파행이나 시장 교란 또는 붕괴가 예상되어도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기전이 없게 된다. 우리 치과계 일각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을 설파해 왔지만, 아직껏 우리에게는 유연성을 지휘할 사령탑이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에 경기침체와 맞물려 공급과잉의 우려에 힘이 더욱 실리고 있다. 최근에 배출된 치전원 출신 면허취득자들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 하고 있고 특히 경인지역에서 극심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치과의사의 수급조절은 치과대학 또는 치전원 졸업생 배출 숫자에 의해 조절될 수 있고, 그 조절은 당연히 교육기관에 대한 인증평가 시스템을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인데, 최근 들어 이 기능을 자임한 기관이 발족하였다. 국회에서는 인증평가를 거부하거나 적정 수준 이하의 점수를 받은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국가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하자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금융시장의 유동성 위기를 미리 차단하거나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해 가는 것은 사실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이를 전담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있으나, 의료인력의 수급 유연성을 관리할 공공기관은 없는 실정이다. 인증평가를 수행할 기관은 그 이름부터가 그렇듯이 태생부터 존속 전반에 걸친 정체성에 있어서 최고도의 공공성을 확보하여 그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저항없이 순종할 수 있는 지엄한 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익단체의 입김이나 영향력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므로 가급적 국가기관이거나 전액 정부출자 기관의 성격을 구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인증평가를 통해 뼈를 깎는 아픔으로 구조조정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한 구석에서는 치과대학 신설 또는 증원을 위한 논의가 진행된다면 이것은 넌센스다. 사실 우리 치과계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이런 뒷구석이 말끔히 치워져야 한다. 아니 그런 발상 자체가 설 땅을 잃도록 하는 것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유럽의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잘못 하면 내가 그리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설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한 마디 항변없이 그 결정을 담담히 따를 수 밖에 없는 공정한 여건이라면 좋겠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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