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월요시론] 치과의사와 오랄 해저드

2010.05.24 00:00:00

월요 시론


 김 신 <본지 집필위원>

 

치과의사와 오랄 해저드

 

매스컴을 통해 우리는 모랄 해저드(moral hazard)라는 용어를 간혹 접한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 또는 위기라고 번역되며,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상식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듣게 되는 사회학적 용어이다. 고임금 집단이 임금투쟁을 벌이거나 적자를 본 정부투자기업 구성원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경우, 저임금 노동자를 대변할 노조 간부들이 본분을 잃고 제 밥상 차리기 바쁠 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전문직종 사람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라는 말을 통하여 묵시적인 사회적 책임이 지속적으로 부과되며, 이것이 해이되었을 때에도 이 말을 듣는다.

 

이 글에서는 이 용어에서 파생된 오랄 해저드(oral hazard)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깊은 사려없이 한 발언으로 인하여 사회에 혼란과 불안을 가져오는 일을 뜻하며 굳이 번역하자면 구설수(口舌數) 또는 설화(舌禍)라 할 "
수 있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기도 누렸지만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어느 대통령의 화법에 대하여 모럴 해저드에 견준 신조어인 이 말을 사용한 때가 있었다. 정부 당국의 책임적 위치에 있는 관리의 말실수로 금융시장이나 부동산시장이 안정을 잃고 요동칠 때에도 이 말을 많이 사용해 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라는 것은 한 번 입으로 내뱉으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괴력을 지닌 물건이다. 별 뜻 없이 한 말이 대화 상대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이것이 화살로 되돌아와 내 가슴에 박혀 고통받은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치과의사가 구설수에 봉착하는 경우는 대개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이전 글에서 필자가 한번 거론한 바와 같이 두 달 전에 어느 아기에게 충치가 3개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잊고 오늘은 5개 있다고 한다면 그 어머니는 대뜸 표정이 바뀐다.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다. 어딘가에 메모를 해 두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나 이 정도의 상황은 그저 환자의 신뢰를 조금 잃을 정도의 단순 사건이지 해저드로 분류될 수준은 아니다. 오랄 해저드 수준의 상황은 대개 요즈음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간혹 어떤 게시판에 올라가 보면 동료 의료인이 돌팔매를 맞고 있다. 글을 올린 사람의 말투에는 적개심이 가득 차 있고, 그 꼬리를 물고 달리는 리플은 정말 난도질 수준이고 살기마저 느껴진다. 이들에게는 상황의 사실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분풀이 수준이다. 매맞는 동료를 좀 구해볼 심정으로 이들과 다른 리플을 달면 나 마저 쳐죽일 놈이 되어버린다. 이런 소용돌이의 주인공이 한번 되어 본 의료인은 치를 떨며 심한 경우에는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돌팔매를 맞고 있는 우리 동료 치과의사가 정말 전적인 말실수나 진료과오로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일까? 대개는 환자가 다른 병원을 찾아가 이 원장과는 판이한 치료계획이나 치료비를 제시받은 경험이 동반된다. 그래서 전자의 원장은 검은 복면을 쓴 강도로, 후자의 원장은 백의의 천사같은 가장 양심적인 의료인으로 한껏 과장되어 묘사된다. 의사마다 치료철학이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이들은 털끝만치도 생각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중간 단계의 색은 존재하지 않고 흑과 백만 있을 뿐이다.

 

직업상 우리는 정말 말조심을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사려없는 말이 나 뿐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료 의사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환자의 문의전화에 대하여 내가 준 응답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녹취되어 법정에서 참고인으로 출두해 달라는 공문서를 한번 받아보라. 진료결과에 불만족한 환자와의 대화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열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평정심을 잃고 공격적이면서 흥분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럴수록 내 입에서는 설화를 자초할 말이 나갈 개연성이 더 높아진다. 


환자는 우리에게 평생의 신뢰와 존경을 보이는 우리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법정이나 게시판의 피고로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소위 촛자 의사를 수련시키는 나는 요즈음 이들에게 이런 주문을 자주 한다. 환자나 보호자의 주머니 속에서 지금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라고. 그리고 제발 말을 과다하게 하지 말라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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