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진 월요 시론] 지혜와 지식

2011.08.29 00:00:00

월요 시론

오성진 <본지 집필위원>

 

지혜와 지식


생각을 깊이 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를 머리 속에 떠 올리고서, 가장 현실성 있고 위험성이 적은 선택을 하는 상태를 말한다. 깊이 생각할수록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 혹성탈출과 같은 공상과학소설에서는 사람에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사람의 지능 이상을 발휘하는 설정이 되어 있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유인원은 동물일 뿐이고, 동물 중에서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가졌을 뿐이지, 그들이 인간과 같은 깊은 생각을 하며 자신들의 발전을 위한 지능을 가졌다는 증거는 아직 본 바가 없다.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반응하는 것은 짐승의 특징이다. 자신을 귀여워해 주면 몸을 부비는 고양이지만,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면, 주인이고 뭐고 없이 “야옹!” 하며 경계를 하는 것이 고양이다. 밥을 먹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면, “으르렁” 거리며 허옇고 험상궂은 송곳니를 보이는 것이 ‘개’이다. 그들에게는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을 결정하는데 수도 없는 생각들을 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닐지라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대학시절에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문제에 관해서 생각을 하였다. 그러는 중에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지혜는 지식을 이용하는 힘이라는 일차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으면 지혜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미래에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서 깊은 생각 없이 지식을 쌓는 일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휘되지 않는 지혜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 많은 지식이 삶에 이용되지 못하고 내 속에만 있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발휘하기 위한 방법, 다시 말해서 지혜를 발휘하기 위한 스스로의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 인가.


방법을 먼저 배울 것인가, 재료를 먼저 쌓아 놓을 것 인가.


한 때, 아이들의 방학숙제를 도와주면서,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해 주는 것이었다. 나의 학생시절에는 자료 얻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숙제를 멋지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뛰는 부지런함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수 많은 자료를 모아서 적당히 편집을 하면 멋진 숙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검색을 한다는 부지런함 외에는, 요령만 있으면 보기에 좋은 자료집을 만들 수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말할 수 없이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참된 풍요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넘치는 자료들은 그때 그때의 일들을 처리해나가는 땜질을 할 수 있는 재료는 되어도, 삶을 넉넉하게 해 주기에는 부족함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마음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남과 함께 나누는 마음이 부족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고 많은 것들이 자신 한 사람의 소유가 될 때,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보통 생각이 아닐까. 열심히 쌓아가다 보면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 그러나 쌓아 갈수록 더욱 쌓이는 것은 더욱 더 부족함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모든 것을 소유할 수도 없을뿐더러,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만을 위해서 쌓아가는 것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제까지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지혜는 의외로 어렵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누구야 놀 자”를 외치던 시절. 그 때 왜 그랬던가. 그것은 혼자서는 결코 즐거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해질 수 있는 해답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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