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머니

  • 등록 2024.06.26 16: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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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주 칼럼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낯선 공책이 눈에 띄었다. 내가 쓰던 것이 아니었기에 확인하기 위해 꺼내던 중 종이 뭉치가 거기에서 ‘뚝’ 떨어졌다. 공책은 어머니가 생전에 쓰셨던 일기장이었고 떨어진 종이 뭉치는 캐나다 여행을 다녀오셔서 쓰셨던 원고였다. ‘서부 캐나다에서 로키산맥까지’란 제목의 글에는 필자가 샌프란시스코 UCSF 치과대학 교정과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인 1995년 6월에 샌프란시스코 집에 며칠 머무시다가 밴쿠버, 밴프 등을 관광하시면서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어머니의 손글씨와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머니가 평소에 일기를 매일 쓰시던 걸 기억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께 어머니 일기장을 달라고 부탁했었다. 어머니의 일기장을 갖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많은 추억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시면서 이사를 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찾아본 어머니 일기장은 몇 권 남지 않은 걸 보관 했는데 그중 하나를 집어 들게 된 것이었다. 

 

어렸을 때 잔병치레가 많아 부모님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고 옆집에 있던 소아과의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파서 학교에 못 간 적이 많았고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자주 가야 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움직일 때마다 마르고 처져 흔들리는 팔다리를 보면서 걷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람 구실 못 할 것 같다며 안쓰러워하였다. 몸이 아파 짜증만 내고 울기만 했을 나를, 어머니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던 시절에 만사 제쳐 두고 대학병원에 업고 가셨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의 등은 왜 그리 따뜻하고 편했는지 모른다. 아파서 누워있을 때면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청승맞은 걱정을 자주 했다. 

 

그 당시 교회에서 33세에 돌아가셨다는 예수님 얘기를 듣고 33살까지라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어렸을 때의 나의 소원이었다. 나의 맘을 알기라도 하셨든지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이 어렸을 때 병치레를 잘 견디면 어른이 돼서는 남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라는 말씀을 수시로 해주시며 건강하고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평생 해 주셨다. 힘들고 아픈 날에 어머니는 한 줄기 빛이었고 소망의 씨앗이 되어 희망과 믿음을 주셨다. 지금은 33세를 지나 그 나이의 2배를 넘겨 노년이 겪는 증상은 있으나 큰 병 없이 살고 있으니 그토록 애써주신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사랑과 기도 덕분이라 생각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오 남매를 키우셨던 어머니는 가족들의 스웨터, 장갑, 목도리나 조끼는 직접 손뜨개로 짜셔 입히셨다. 웃는 모습이 참 고우셨고 감수성이 풍부하셔서 편지나 글을 쓰시면 남들의 맘을 흔들 정도의 문학적인 감각을 가지고 계셨었고 어려운 이웃 돕는 것을 당연히 여기셨다. 

 

사리 분별할 줄 아는 어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차 조심도 하지 않고 잘 챙겨 먹지도 않고 비 오는 날 우산도 안 챙겨가고 추운 날 목도리와 장갑도 하지 않는 철부지 어린이로 여겨 늘 자식 안전과 건강에 대한 걱정이 끝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슬프고, 힘든 일을 즐겁고, 쉬운 일로 바꿔주는 해결사이셨고 해주시던 음식은 보약이었고 사랑이었고 위로였지만 이젠 추억이 되었다. 

 

언제나,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걸 자식에게 주셨고 정작 본인은 아파도 자식들이 걱정할까 아프단 말씀을 잘 안 하시고 괜찮다고만 하시며 주름지고 마른 손으로 저만치 걸어가시는 구부정한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 어떤 자식이 부모가 그립지 않으랴만 오늘같이 하늘이 푸른 날이면 유난히 어머니 생각이 난다.

 

송정림 씨가 쓴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라는 책에는 선생님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제목을 중학생들에게 주면서 글짓기를 시켰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 학생이 있었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당연히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쓸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의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이생에서 내가 받은 고마움을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서 무조건 보답하면서 살고 싶다. 이생에서 내가 어머니의 고마움을 보답하며 사는 건 너무나 힘들기에, 제발 다음 생에선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서 그 무한한 사랑을 갚고 싶다.”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감사하며 그걸 어떻게 갚을까 생각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정용원 시인은 ‘어머니’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를 회상하였다. 

 

찬 바람에 문풍지도 떠는 밤/문 앞에 누운 어머니/“얘야, 감기들라/ 아랫목에 자거라.”//
어머닌 감기 들어/ 끙끙 앓으시며/ “귀여운 우리 아들 밥 비벼줄게 많이 먹어라.”//
엄마의 사랑을 비벼/ 밥 한 그릇 비우고//
이불 속에 가만히/ 자는 채 누웠다./ 내 이마 쓸어주시는/ 주름진 손//
“엄마는 바보야,/ 내가 자는 줄 아는가 봐./ 엄마가 자야 나도 잘 텐데.”

 

춥고 긴 겨울밤, 감기에 걸려 끙끙 앓으면서도 따뜻한 아랫목은 아이에게 내주고 윗목을 차지하며 바보 같이 사셨던 어머니. 허기진 아이에게 사랑으로 밥을 비벼주고 주름진 손으로 ‘어서 자거라’ 하고 이마를 쓸어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엄마가 자야 나도 잘 텐데’에 엄마를 생각하는 철든 아이의 애틋한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뱃속에서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는 ‘엄마’이고 태어나서 제일 안정되게 느끼는 건 어머니의 품이며 제일 먼저 보는 것도 엄마의 눈동자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정말 위대한 분이다. 내리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감히 알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유대인의 속담에는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가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그리워지고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불거지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말로나 글이 아니라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셨던 그 고마움 때문이다. 

 

오늘은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까 귀를 기울여 보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고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경치 좋은 곳도 모시고 가고 싶은데 같이 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운 미소와 인자한 음성과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 그리고 어머니의 밥상이 이만큼 더욱더 그리워지는 날이다. 천국에서 편히 쉬고 계시고 가족들의 가슴에 언제나 살아계시는 어머니를 뵐 날을 기약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황충주 연세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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