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삶 /혜원스님/있다 없다로 말할 수 없는 공(空), 참나

2009.01.15 00:00:00


지난 번에 이어 나의 ‘참’ ‘진짜 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나"라고 믿고 인정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 변하는 것, 이차적인 것이요, ‘참나"라고 하는 것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일차적인 힘의 원천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참나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라서 우리가 선뜻 인정하기도 어렵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드러나지 않아서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참나는 설명되어지는 게 아니라 느끼고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작년 씨에서 싹이 터 나무로 자라고 거기서 올해 열매가 열게끔 하는 근본 성품을 사람에 비유하면 ‘참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나도 이름이요 표현입니다 굳이 ‘참나"라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뿌리"라 해도 좋고 ‘내 님"이라 해도 좋고 배의 선장 같다고 해도 좋습니다. 옛날 선사들중에는 ‘한 물건"이란 표현을 쓴 분도 있고 ‘한마음"이다, ‘주인공"이라고 말하신 분도 있습니다. 불교의 전통적인 용어로는 불성(佛性), 진여(眞如), 자성불(自性佛), 일심(一心)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어떤 꽃에 장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로부터 ‘장미"라고 부르듯이 ‘참나"를 뭐라고 하든 그것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분들이 스스로 이름을 지어불러도 됩니다. 가령 주인공으로 불러도 되고 아버지라 해도 되고 주인님, 주님, 내 부처님이라해도 됩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만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옛날 어떤 선사께서는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라고 했는데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나"를 어떤 유형의 존재처럼 유(有)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無)로 말할 수도 없으니 공(空)이라고 했습니다. 공(空)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있다고 해도 그걸 보고 만질 수 없으니까 틀리고, 없다고 해도 막상 부정할 수 없으니 틀립니다. 그래서 공은 유와 무를 한데 아우르는 자리요, 일체의 근본이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나"는 나의 주인이면서 유·무를 떠난 공의 자리, 주인(主人)+공(空)입니다.


참나를 아는 첫걸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모든 생명에 존재하는 근본 성품으로서의 ‘참나’는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믿지 않으니 드러나 보여지지 않을 뿐입니다. 내 속에 있다는 그 무한한 보배를 찾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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