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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순 데레사 수녀] 온전히 존재하는 나

종|교|칼|럼| 삶

노석순 데레사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온전히 존재하는 나

  

몇 칠전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1년에 한번, 14일 동안 수도 공동체를 떠나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한 규정에 따라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 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도 저를 가장 반기시는 어머님은 여전히 쓸쓸한 미소로 휠체어에 앉아 계셨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팔, 다리가 마비되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신지 벌써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셨던지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당신을 자책하셨습니다.


자식들의 어설픈 위로와 간호를 귀찮아 하셨고, 좋아하시던 텔레비전도, 드시는 것도 즐겁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들의 방문에도 기운을 내지 못하시고, 친구 분들과의 대화도 싫다며 거절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슬프고, 어떤 것에도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시는 듯 어머니는 외로워 보였습니다. 종교생활에 대한 저의 권유도 자신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시듯, 저의 어머님도 자녀에게 베푸는 조건 없는 사랑을 행하실 때 어머니로서의 가장 큰 존재감을 확인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농사일을 억척같이 하셔도 성장하는 자식들 때문에 보람을 얻으셨고, 조금씩 넉넉해지는 집안 형편에 신이 났다고 했습니다.


쌀, 고추장, 된장, 김치 마늘, 고춧가루…. 수많은 농산물을 5남매에게 나눠 주시며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며 자주 웃으셨습니다. 자식에게 향한 아버지의 독재에 어머니는 평화의 중재자로서 언제나 용기 있고 공정했습니다. 저희는 아쉬운 때마다 어머니를 불렀고, 어머니는 언제나 재빠르면서도 기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주시며 당신의 존재감을 찾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당신 고유의 몫을 가족에게서 확인받으시며, 당신의 삶을 걸어 오셨던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의미가 없고, 앞으로의 시간이 두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는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쉬울 땐 언제나 편안하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든든한 내 인생의 후원자로 여겼던 지난날과는 달리, 아무것도 해 주실 수 없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게 어머니로서 존재하고 계십니다. 어머님으로부터 받아왔던 수많은 사랑이 어머니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 갑니다. 그래서 예전에 받았던 그 사랑이 끊어져 버린 지금도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로서 존재하고 계시고, 예전과는 다른 모양의 사랑을 나눠 주심에 감사드리게 됩니다. 존재하심만으로 충분한 어머니는 제 삶이 주는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 노력합니다.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열정과 기쁨도 생기고, 인정을 받아 성취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그 결과를 소유하게 되고 사람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도 그 일들과 관계가 내 존재의 전부인양 지키려 애를 쓰고 발전시키는 것에 온 에너지를 다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어떤 것도 고유한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존재함으로써 충분히 소중하고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과물이나 누군가로부터 오는 지지와 격려가 없어도 우리는 존재자체만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이면 누구나 존재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존중받아야할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저의 존재감의 근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며, 하느님께 받쳐질 고귀한 저 자신입니다.


세상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소유하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창조주 앞에서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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