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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아네이라: 사내를 죽이는 자, 고귀한 여인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딸을 희생한 남편에게 복수하며 악령의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 주에 소개할 비극 여주인공 데이아네이라는 남편의 사랑을 되찾으려다 남편을 살해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자결하는 고귀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네요.

데이아네이라(Deianeira)는 “사내를 죽이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사내가 남편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 영웅 헤라클레스입니다. 제우스의 아들로 인간사회를 위협하는 괴물들을 퇴치하기에 문명의 수호자이며 인류의 은인이라 불립니다.

그리스 비극 이전의 데이아네이라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여걸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마음이 눈멀어 옷에 독을 발라서 남편에게 보내자 남편이 그 옷을 입고 죽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자 데이아네이라가 질투에 사로잡혀 고의로 남편을 독살한 것입니다.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에서 데이아네이라는 다른 인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중년 부인 데이아네이라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문명의 수호자며 인류의 은인이지만 가정에는 너무나도 소홀한 남편입니다.

남편은 집을 떠난 후 15개월 동안이나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갑자기 도시 오이칼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남편이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녀의 불안과 공포가 더욱 더 커져 갑니다. 남편이 집을 떠나며 의미심장한 신탁을 서판에 남겼기 때문이죠. 그 신탁은 남편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승전 소식이 전해집니다. 데이아네이라는 남편과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겠죠. 갑자기 전령이 여자 포로들을 이끌고 도착했는데, 그들 가운데 너무나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눈에 띱니다. 당장 데이아네이라는 그녀를 동정합니다. 젊은 나이에 조국을 잃고 노예 신세로 전락했으니까요. 그녀는 누구일까요? 그녀는 바로 이올레 공주인데, 놀랍게도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여 그녀의 도시를 정복하고 그녀를 첩으로 집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데이아네이라는 분노합니다. 오랫동안 혼자서 집을 잘 보살폈는데, 저 선량하다는 남편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집에 첩을 보냈단 말인가요? 어떤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한 이불 아래 남편을 기다린단 말인가요? 늙어가는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이 때 데이아네이라는 희미한 과거를 또렷이 떠올립니다. 헤라클레스와 갓 결혼하여 여행을 떠나 강에 이르렀는데, 반인반수 넷소스가 강 건너편에 사람을 옮겨주고 있었습니다. 넷소스가 먼저 데이아네이라를 업고 강을 건너고 나자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애욕이 불타올라 그녀를 범하려 합니다. 이를 목격한 새신랑은 독이 묻은 화살을 쏘아 넷소스를 맞춰 죽입니다. 넷소스는 죽어가며 그녀에게 일종의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사라져버릴 남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정말로 사랑의 미약인지, 데이아네이라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미약을 시험해 봐야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은 행동을 통해 얻어지는 법이죠. 지금이야말로 젊은 여인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남편의 사랑을 되찾아 손상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새 옷에 사랑의 미약을 듬뿍 발라서 전령의 손에 들려 남편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의 미약은 독약으로 밝혀지고, 독약이 발린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타 죽어갑니다.

이 비극은 남성 영웅 세계와 여성 가정 세계의 대립을 잘 보여줍니다. 남성적 사랑의 원심력과 여성적 사랑의 구심력이 충돌하며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의 상호파멸을 낳은 것이죠. 데이아네이라는 사랑의 미약을 사용해 남편을 살해하는 과실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되찾아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기에 데이아네이라는 동정과 용서를 받아 마땅합니다. (참고문헌: 김 기영, 『그리스 비극의 영웅 세계』, 도서출판 길, 2015)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기영
서양고전학자,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 및 서울대 객원연구원.
저서로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세계>, <신화에서 비극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신화의 숲에서 리더의 길을 묻다>(공저) 등, 역서로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왕 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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