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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미쉘과 케번디쉬

시론

어린 시절 바나나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트 뿐 아니라 편의점에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흔한 과일이다. 이렇게 바나나가 흔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류의 효율성과 대량재배가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바나나의 품종은 케번디쉬(Cavendish)라고 한다. 놀랍게도 바나나는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씨앗을 심어 다음 세대의 바나나 나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줄기를 잘라 심어서 개체를 번식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영양번식 (vegetative propagation)’이라고 하며 먹기 불편한 씨를 없앤 바나나를 만든 후 지속적으로 ‘영양번식’하여 동일한 개체들을 만들어 낸 바나나의 첫 품종은 그로미쉘(Gros Michel)이었다. 이 품종은 전세계적으로 판매가 되었으며 어린 시절 목욕탕에서 나와 먹던 그 유명한 ‘바나나맛 우유’도 이 품종의 맛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가장 맛있는 바나나인 이 ‘그로미쉘’ 품종은 Fusarium이라는 곰팡이에 의해 감염되어 완전히 멸종되었다.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모든 개체들은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었고 결국에는 멸종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품종이 바로 영국에서 개량 재배된 모르셔스 원산지의 ‘케번디쉬’이다. 이 품종 역시 ‘그로미쉘’과 같은 씨 없는 바나나이다. 현재 이 품종에 대한 곰팡이병이 확산되고 있으며 단일 품종인 이 바나나는 현재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치과가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충치를 때우고 금니를 해 넣으러 치과에 가면 환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하라는 대로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네거리에 치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동네의 모든 치과는 충치치료를 하고 스케일링을 하며 임플란트를 심는다. 영국의 온실에서 케번디쉬 공작이 씨 없는 바나나를 ‘영양번식’한 것처럼 거의 동일한 모습을 가진 치과의사들이 온 동네에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치과에 대한 이슈가 등장하거나 소위 덤핑치과가 주변에 들어오면 마치,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나나가 곰팡이에 감염된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큰 영향과 타격을 받고 있다. 옆의 치과와 다른 점을 찾아내기 어려운 우리는 케번디쉬 바나나와 같이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또 수많은 신규 면허 치과의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평생 근무할 자신의 치과의원을 기대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것이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 것인가, 홈페이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수많은 고민들이 과연 기존의 치과의사와의 작은 차별성이나마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동일 유전자를 가진 동일 품종과 같은 모습으로 지금 원장실에 앉아있게 된 것일까?

식용이 가능한 바나나의 품종은 100여종에 달하지만 사람의 입맛에 맞고 운반과 유통에 적합한 품종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워 아직까지 적절한 품종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유전적인 다양성이 존재할 때 생물은 생존하고 또 진화가 가능하다. 획일화된 생산과 소비는 현재 시장점유와 수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결국 종의 다양성에 손상을 주게 된다. 이는 멸종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2018년 내 치과의 원장실에 앉아 조금은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것으로 새 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나는 누구인가, 내 치과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치과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 그리고 나는 곰팡이균에 살아남을 유전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가”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모습을 가진 케번디쉬가 지금 멸종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창진
미소를만드는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