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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시론

정말로 우리 모두가 기뻤고, 지구촌 전체를 행복하게 했던 지난 겨울 평창의 축제는 한반도의 지루한 긴장을 풀어주고, 한없이 춥기만 하던 북미관계에 마술같은 봄바람을 불러왔다. 그런데 계속해서 끈질기게 대북불신 발언수위를 유지하던 야당대표의 주장에 화답이라도 하듯, 올림픽 끝나고 한 계절도 안 지난 이 달초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우리의 평화 애호적인 의지를‘나약성’으로 오판하고, 우리에 대한 압박과 군사적 위협을 계속 추구한다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예전의 목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하였다.

 서로가 원하는 바가 다르기에 여태껏 대화와 소통이 내내 어려웠던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소위 ‘해결을 향한 상황의 진행’에 대한 쌍방간 최소한의 구체적 약속없이‘그럼, 잘 지내보자’는 식의 막연한 화해무드란 것에서, 당연히 어느 정도의 조율과정과 혹은 예기치 못한 교착상태가 예견되는 것이었지만, 작금의 분위기가 여러 번 있었던 동상이몽의 되풀이가 아닌가하는 근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일랜드 출신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남자들은 지쳐서 결혼하고, 여자들은 호기심 때문에 결혼한다. 그리고 양쪽 모두 실망한다.’(오스카리아나, 2016 민음사)라는 짧은 말에서도 밝혔듯, 인간은 서로에게 몹시도 중요한 공동사안에 대해 원하고 향하는 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오해의 존재를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습관이 있거나,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 것까지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화속의 단절이고 금세 겨울로 돌아갈 허망한 봄이다.

약속없이 갑자기 내원하여 다른 예약환자 사이에 신환으로 보게 된 하악지치주위염의 초진환자가 파노라마방사선사진과 문진, 시진후 일단의 치료계획을 내게 듣고 되묻는다. “아래 사랑니 빼고 나면, 안 아플까요?” 다른 환자로 바쁜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네, 그럴거에요!” 환자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그럼 빨리 빼주세요!”라며 유니트체어에 기대버리고, 보조인력은 마취와 발치준비를 할 기세다. 선장은 뱃고동도 안 울렸는데 배가 뜨려한다. 여기서 내가 그대로 따라가면 위의 얘기들과 똑같은 상황이다. 인접 제2대구치의 원심면도 확인하여 잔존 동통의 가능성도 설명해야 하고, 지치발치 난이도의 다양함과 환자의 가용시간, 내일 내원가능여부, 우리 병원의 진료예약현황,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것들을 환자가 알 리도 없거니와, 알아도 그건 순전히 나의 판단과 능력과 관련된 사정인 것이다.

모든 것이 완전한 여건 하에 진행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을까마는, 사람 간에 특히 여러 사람이 관련된 공공의 사안이라면 긍정적 여건조성과 공리적 결과를 극대화하려는 성실한 노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저 취향과 개성이 존중되는 취미나 개인적인 삶의 태도와 같은 일에 대해 공리와 여건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오답을 낼 뿐이겠지만, 그런 개인에 국한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틀린 질문만 하니 틀린 답만 얻을 뿐이라는 인상적인 대사가 나오는 영화 ‘올드보이, 2003’의 주인공 오대수(최민식분)는 “내 이름이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객기 가득 담아 여러 사람 앞에서 스스럼없이 자학적이고 무책임한 본인의 이름풀이를 하는데, 이 장면은 공동체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자기 자신의 사회적 identity를 애써 가벼이 여기는 주인공의 불행을 초반의 복선으로 예고하며, 우리가 살아가며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절대 나 혼자일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스토리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 치과계의 얼굴인 치협의 선거무효판결과 재선거에 이르게 되는 과정 속엔 위의 이야기들과 많이 닮은 요소들이 있다. 오대수와 친구 우진(오대수를 가둔 이)중 누가 먼저, 또는 누가 더 크게 잘못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건 개인의 판단 영역이고 앞서 얘기했던 틀린 답과 소음만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들을 만들어낼 소위 ‘틀린 질문’이니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올드보이’스토리의 발단이 아주 사소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말로 오대수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이 큰 상처를 주고 만다.

치과계는 한 가족이다. 어려운 시대를 함께 지내다보면 나와 다른 생각과 처사에 화가 날 수도 있고, 언성 높혀 다툴 수도 있겠지만, 대화와 소통과 화합에 서로 충분히 성실해야 한다는 원칙과, 아무리 갈등의 골이 깊어도 문제해결의 방법선택에 있어서 어느 선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배워야 할 일이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호 서울 중구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