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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구강보건전담행정부서 독립이 지니는 의미

기고

우리나라에 치과의사법(1913)에 따른 치무행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지 100여년이 지났다. 그 동안 중앙행정부에 치무 및 구강보건 전담 부서가 독립했던 시절은 미군정기, 4·19 직후, 아태치과연맹국제회의전후(1967~1970), 1997~2007년을 통틀어 17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보건복지부에 구강보건전담부서가 ‘구강정책과’란 직제로 부활(2019.1.15) 했다.

왜 우리나라 구강보건전담부서는 잦은 개편과 폐지라는 수모 속에서도 다시 부활하는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 궤적이 지니는 의미를 통찰하여, 21세기에 부활한 구강정책과의 생존과 발전방향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치과의사면허 1호(함석태, 1914)가 발부된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의료법이나 치과의사 수, 면허, 교육 등의 관리를 주도한 것은 국가였다. 그래서 국가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위정자의 보건의료정책에 따라 치과의료분야에 관리방식과 구강보건에 대한 역할도 달랐다.

일제 총독부는 식민통치를 위한 치과의료정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인 치과의사 양성은 최소로 하고, 입치영업자의 영업은 합법화했다. 치무행정은 위생경찰이 담당했다. 조선총독부 의원(중앙)과 자혜의원(지방 도립병원)에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을 배치하여 조선을 문명화시킨다는 선전용으로 활용하였다. 후생국(1941)이 학생 ‘치마교련’이나, 주민 ‘이닦기 사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조선인들의 구강건강을 향상시켜 징병을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독립된 치무과가 생겨, 치무국으로 승격했다. 치무국은 최소의 비용으로 친미적인 치과의료질서를 구축했다. 학생무치의촌 순회진료때 초등학교 배포용 괘도를 들려보내고, 보건소 한 곳 운영하지 않았다. 치무행정은 면허갱신과 입치영업자의 한지의사승격 경성치전의 국립서울대학교 편입 같이 당면과제를 해결하는데 국한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보건 분야에 돈을 쓸 여력이 없었다. 사회부 내 보건국으로 축소되었다. 의료인 단체의 노력으로 보건부가 부활했으나, 치무행정은 의무행정과 일반 보건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지속된 정치적 불안정과 가난 속에 국민들의 치과이용률이 매우 낮았다. 역대 보건부장관을 주로 의사들(1949~1969)과 정치 관료들이 담당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민간차원의 무치의촌 이동진료와 구강보건교육을 독려하였다. 서울 아태치과연맹 주최 전후 치무과를 존속시켰다가 의정과로 흡수했다(1975).

한편 1977년에 시작된 의료보험은 민간주도의 의료서비스공급을 사회보장형으로 변화시켰다. 역대 정부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을 의료보험확대를 통해 완화하려 했다. 12년 만에 전국민의료보험실시(1989)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비민주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의료보험과 연계된 구강보건정책에 대한 공공토론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동안 12세 아동 치아우식증 경험지수(DMFT)는 1972년 당시 0.6개였던 것이 1995년 3.1로 6배 가량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치과외래수진율도 크게 증가했다. 1인당 GDP가 9000달러(1993)로 성장했고, 지방자치제도 부활하고, 시민들의 비정부단체(NG0)활동도 증가했다. IMF경제위기(1997)에 치과의사들은 시민단체와 결합하여 각 지방자치단체에 수돗물 불소농도조절 사업 시행을 청원하여 총인구의 13%(2001)로 확대했다. 동시에 구강보건전담행정부서설립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국민서명운동과 공청회, 각계 정당대표 및 각처 장관과의 면담을 벌렸다. 그 결과 구강보건과(1999)가 설치되고 구강보건법(2000)이 정비되었다.

구강보건과는 수돗물블소농도조정사업, 치아홈메우기, 노인의치 등의 사업을 했다. 그 결과 12세 아동 치아우식증 경험지수는 2000년 3.3에서 2006년 2.2로 낮아졌다. 그러나 수돗물블소농도조정사업을 반대하는 환경론자들과 소비자선택권 강화 여론이 발목을 잡았다. 복지부내 지지기반과 전담인력 및 예산의 부족 속에 구강정책과(2003)에서 구강보건팀(2006)으로 격하되었다. 이어 ‘의료법 개악 반대 투쟁’에 대한 보복조치로 구강보건팀을 해체(2007.3.17.)되고 생활위생팀,‘구강·생활위생과’(2008)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역대 정부가 회피해 온 국민구강보건에 대한 책임을 치과의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치과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제안하고, 세계 시장에 임플란트와 3차원 영상기기를 내놓았다.

 2010년대 국민들의 복지와 일자리 요구는 더 절실해졌다. 대통령 후보들은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4차 산업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급증한 건강보험부담금과 장애인 구강건강을  해결하고, 4차 치과의료산업을 총괄할 전담행정부서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이제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문제들과 우려되는 사항을 해결할 처방전들을 써야할 시간이다. 

 첫째, 현재 치과의사들의 97%는 진료업무에 전념하면서 치과의료정책이나 제도, 구강보건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구강정책’은 치과의료전반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사안이다. 따라서 더 많은 치과의사들이 전문진료영역과 이해만을 우선하는 덴탈 캐슬(Dental Castle)을 깨고 구강 스퀘어(Oral Square)로 나와야 한다. 그곳에서 국민들의 요구와 바람직한 정책상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서로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치과의사협회 집행부나 예방치과학과 산학협력 연구자 등은 상설위원회 등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또 필요하다면 정부 관료나 정치인, 사업가들과도 교섭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국민들의 구강건강안정망이 구축되고, 파이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구강정책과’가 자리를 잡게 되면 점차 치과의사 면허 및 자격유지에 대한 준 입법 및 사법적 기능까지 수행하게 될 것이다. 치과의료현장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통제와 적발 위주의 관리가 아닌 문제해결을 돕는 촉진자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치과의사들의 관심과 협조만이 ‘구강정책과’의 부활과 존폐위기를 국민구강건강과 치과의료발전의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연 세브란스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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