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언제나 편하게/단편소설

언제나 편하게

 

오늘 밤이 어때? 감미롭게 넘어가던 와인이 목구멍에서 걸린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웃음이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뜻밖의 말이다. 뜻밖의 얼굴 표정이다. 마치 뜻하지 않은 연극 속 배우를 보는 듯하다. 20cm 거리의 그녀가 낯설다. 그녀의 숨소리는 잔잔하다. 와인 내음이 풍기지 않는다. 눈동자가 반짝인다.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녀가 그런 대답을 했을까? 순간 기억이 가물거린다.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본다. 그녀는 조용히 와인 잔을 입술로 가져간다. 웃음이 번지는 입술 속으로 와인이 스며든다. 옅은 초콜릿 색 입술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때, 오늘 밤? 그녀가 다시 한 번 나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와인이 스며든 그녀 목소리는 초콜릿처럼 달콤하다. 좀 더 나에게 다가오며 더 진하게 웃는다. 숨소리는 차분하다. 반쯤 남은 와인을 음미하지 않고 냉수처럼 벌컥벌컥 들이킨다. 와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동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늘? 좋지. 쉽게 대답이 나온다. 취기 때문에 나온 대답이 아니다. 놀라움에 나온 대답이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숨을 빠르게 가라앉힌다. 들숨날숨을 몇 번 크게 쉬면서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소믈리에를 불러 비틀즈의 ‘Yesterday’와 해리 넬슨의 ‘Without You’를 신청한다. 비워진 내 술잔에 와인을 찰랑찰랑 거리며 붓는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다.


우리가 와인 바에 온지 30여 분. 두 잔째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녀가 ‘오늘 밤이 어때?’라고 했을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최근 세 번째 만남이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고 싶었다. 그녀가 이웃집으로 이사 와서 우연히 몇 번 눈인사만 한 사이 같았다. 자주 가는 와인바가 이 근처에 있는데…. 그곳에 가면 어때? 그녀의 대답이 재빠르게 나왔다. 물론 내가 먼저 합정동 사거리에서 말을 꺼냈다. 커피 한 잔 할까?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가 쉽게 와인 바로 가자는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 거절할 것이라 짐작했다. 쉽게 나온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와인 바로 가자는 대답에 더욱 놀랐다.

 

합정동 넓은 사거리는 언제나 바쁜 걸음으로 가득 찼다. 10월의 밤 9시는 헤어지기 쉽지 않았다. 바쁜 걸음을 여유롭게 만들고 싶어졌다. 바쁜 걸음들 속에 그녀는 당당하게 걸었다. 장 과장과 함께 홍대 입구에서 합정동 쪽으로 세 명이 걸어오는 동안 그녀는 바쁜 걸음이 아니었다. 5여 분을 걷는 동안 부츠 소리는 귓속으로 또렷하게 들렸다. 에르메스 갈색 머플러가 가을바람에 우아하게 너울거렸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바쁜 표정이나 걸음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나와 장 과장은 괜히 바쁜 듯 여유가 없어보였다. 오늘은 집안 사정으로 먼저 갈게. 다음주 목요일에 봅시다. 망원동 쪽으로 걸음을 돌리며 장 과장이 먼저 우리와 헤어졌다. 10월의 바람이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다. 밤바람은 유난히 상쾌했다. 바람은 여유롭게 우리 둘을 감쌌다. 그녀의 갈색 머플러가 살랑살랑 나풀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도 갈색 머플러가 살랑거렸다. 갈색 머플러가 나부끼는 사이로 그녀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바람 속으로 숨어들며 스스로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바람 속에서 당당했다. 나는 바람에 휘말려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을바람은 바쁜 걸음들 사이로 여유롭게 맴돌았다. 가을바람이 나의 발걸음을 잡아버렸다. 여유스러운 채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을 먼저 했다. 그녀와 한 달 동안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는 12년 만에 다시 만난 전처였다. 그럼 와인바로 가자. 내 대답을 듣자마자 밤바람을 상쾌하게 맞으며 그녀는 발길을 돌렸다. 나도 몇 번 와본 적 있는, 합정동 뒷골목 유명한 와인바였다. 언제나 올드팝이 흘렀으며, 스탠드바에서 마시는 와인은 감미로웠다. 그녀가 와인을 즐겼던가? 순간 예전 기억을 더듬어봤다. 기억은 깜빡깜빡할 뿐이었다.

 

탤런트 송중기를 닮은 30대 후반 소믈리에가 와인에 대해 개그스타일로 웃기며 재치 있게 설명했다. 그녀와 소믈리에가 친구처럼 웃으며 편하게 얘기한다. 내가 보관한 와인을 줘. 와인바에 편하게 어울리며 말을 던진다. 나 홀로 어색하게 쭈뼛거린다. 앉아. 그녀의 분위기는 언제나 편한 듯하다. 그녀가 낯설어 보인다. 그녀와 어색함으로 채워졌다. 앉으세요. 소믈리에가 친근하게 말한다. 의자가 어둠 속에서 어지럽게 보인다. 의자가 넘어지는 듯해 의자를 꽉 잡는다. 조심해서 앉아. 그녀가 오늘 내내 말을 낮춘다. 의자에 앉았지만 그녀와의 어색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소믈리에가 안주로 치즈와 아몬드를 내밀자 바로 치즈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가 낯설음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치즈를 오물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잔에 와인을 붓는 그녀 손길은 은은한 조명 아래 시간을 요리하듯 우아하고 여유롭다. 그녀의 손가락이 와인병을 소믈리에 같이 묘기 부리듯 움직인다. 시간이나 공기, 심지어 와인병조차 그녀의 손길에 놀아나는 듯하다. 치즈를 급하게 꽉 씹었다. 악관절이 아플 정도로. 그녀가 점점 더 낯설어 보였다.

 

그녀를 스페니쉬 어학원에서 한 달 동안 세 번째 만나는 학원생으로 대할까? 아니면 12년 만에 만나는 이혼한 아내로 대할까? 어색하고 낯선 시간들이 송곳처럼 온몸을 찌른다. 머릿속에서 식은땀이 흘러넘치는 듯하다. 먹먹하기도 하고,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뒤엉킨 머리를 정리할 수 없다.

 

오랜만이야. 자 한 잔 하자. 잔잔하게 또박또박 여유롭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웃으며 와인을 마신다. 입술로 스며드는 와인소리가 경쾌하다. 출판사도 하면서 아직 K대학교에 근무하고 있어? 엉겁결에 ‘응.’ 대답했다. 그녀의 분위기에 짓눌리고 있다. 질식할 듯 가슴이 조여 온다. 학원생으로 대하든 이혼한 아내로 마주하든 어느 쪽이나 나에게는 어색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야? 장 과장이 동기회에서 만나서 물었을 때 네가 좀 도와줘. 인생 밑천 다 떨어졌다. K대학교를 나오고 벌린 출판사도 겨우 지탱하다가 2여 년 전부터 적자로 돌아섰다. 너 여행 좋아하잖아. 어학전공이었고, 남미나 스페인 쪽 여행 가이드 해보지 않을래? 우리 여행사에서 마침 스페니쉬 언어권 전문 여행 가이드를 구하고 있는데…. 함께 6개월간 단기 특별 강습학원에 다니자. 고민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탁한다.

 

내 취향에 맞겠네. 40대 초반의 불안은 안전하지 못한 경제능력에서 시작된다. 이미 나는 20대부터 헐떡거리는 삶으로 아슬아슬하게 보내지만, 그래도 야심찬 꾀로 그동안 지탱해왔다. 홍대입구에 있는 직장인들을 위한 단기 특수 어학원이야. 매주 목요일마다 두 시간 강의가 있지. 그렇게 말하는 장 과장을 따라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 달 전이었다. 어학원 첫 수업에서 함께 공부할 10명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 때 장 과장이 깜짝 놀라 나를 툭 치며 한 여자를 가리켰다. 깜짝 놀랐다. 숨이 순간 멈췄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그녀가 있었다. 12년만의 대면이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본 건지, 아니면 모른 채 하는 건지 학원 교실 앞자리에서 담담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성산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40대 초반 김혜경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나를 스치듯 눈길이 지나갔지만, 얼굴에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12년 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단아하고 우아했다. 살짝 화장한 듯한 얼굴은 뽀얗고 반질반질했다. 프라다풍 투피스 베이지색 정장이 의외로 그녀에게 어울렸다. 안정됐다는 느낌이 온몸에서 풍겼다. 행복한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대학로에서 조그마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40대 초반 이경석입니다. 굳은 목소리로 소개를 했다. 힐끗 그녀를 봤다. 그녀는 여전히 덤덤했다.

 

첫 수업을 마친 후 그녀는 바람결처럼 자연스럽게 걸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장 과장이 툭 치더니 그녀에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먼저 했다. 나도 덩달아 그녀에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반갑다고, 오랜만이라고 화답했다. 함께 수업 잘 받아보자는 끝인사까지 하면서 총총 계단으로 내려갔다. 12년 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낯설 수 없는 모습이 그녀에게 남아있었다. 장 과장의 놀랐다는 탄성을 계속 들으며, 가슴 깊숙이에서 치솟아오르는 자괴감을 느꼈다. 범행현장에서 검거된 범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저 여자가 저렇게 예쁘고 우아했었나? 장 과장의 들뜬 목소리가 귀로 들어오자마자 장 과장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두 번째 수업 후 장 과장이 그녀에게 먼저 커피 한 잔을 권했다. 방긋 웃으며 그래요. 그녀에게 쉽게 응답이 나왔다. 나는 두 사람의 들러리처럼 커피숍에 앉았다. 마치 세 사람은 오래간만에 만난 고교동창 같았다. 두 사람은 앉자마자 자주 만나는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다. 어학원이나 강사 그리고 언어발음에 대한 것이 그들 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편하게 웃으면서 잔잔하게 말을 했다.

 

잠시 그들을 피하고 싶어 커피주문을 받고 주문한 커피와 허브차를 가져왔다. 그녀에게서 12년 전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예전에 그녀는 핼쑥했던 볼에서 그늘진 주름이 보였었다. 입가에는 웃음이 없었다. 목소리는 축 쳐져있었다. 성형한 얼굴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얼굴은 변신했다. 함께 커피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동창처럼 능청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30여 분 동안 그녀는 12년 전 아내가 아니었다. 나를 보는 눈길은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얘기를 했다. 잠시 장 과장이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가 느긋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12년 전 그때 고마웠어요. 혹시 만난다면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온몸이 감전된 듯 저릿했다. 뇌신경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다. 혀가 굳어지며 말들을 잃었다. 잠시 먹먹한 동안, 고맙다는 말을 그녀에게서 세 번째로 들었다. 장 과장이 자리에 앉자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헤어져서 집에 오는 동안, 고마웠다는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K에게 전화 왔을 때도 건성으로 응응 대답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말한 고마웠다는 단어가 밤새 잠을 쫒아냈다. 뇌신경을 완전 가동해도 상대성 이론의 공식처럼 답을 낼 수 없었다. ‘왜?’라는 의문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오싹오싹 떨었다.

 

나를 미워하고 외면하면서 함께 자리를 하지 않을 줄 여겼다. 오히려 그녀는 당당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의젓했다. 하지만 나는 능청스러울 수 없었다. 12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얼굴을 기억하면 고마웠다는 말은 나에게 의문일 뿐이었다. 서울가정법원 근처 커피숍에서 파리하고 지친 얼굴로 나에게 더듬거리며 던진 말이 기억났다.

 

왜 하필 나였어요? 마치 트로트풍의 노래가사인 듯했다. 하지만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하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의 포획물이었다. 잘 지내렴. 그동안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해. 사냥꾼으로서 누리는 마지막 온정이었다. 커피숍에서 나올 때 힐끗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흐느낌이었다. 깊게 흐느꼈다. 그녀가 커피숍에서 얼마를 앉아있었는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홀가분했다. 차 키로 시동을 걸었을 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결혼 3여 년 동안 그녀는 초라했다. 약사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처량했다. 3여 년을 그녀와 함께 살아온 스스로가 대견했고 인내심이 강하구나 자찬했다.

 

금요일 아침 장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흥분된 목소리는 폰에서 쨍쨍 울렸다. 정말 맞아? 예전 혜경 씨가 맞아? 네가 자기 재산을 따돌린 것도 모르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너에게 묻고 싶다.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어학원을 그만 둘까? 너는 괜찮아? 능청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생활도 급해! 친구에게 신경질 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일주일이 뒤숭숭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겨우 잠들기까지 웅웅거렸다.

 

주말에 K와 만났을 때 시름거리며 아프다는 핑계로 섹스를 하지 않았다. K가 의아한 듯 보챘다. 아랫도리를 꽉 쥐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을 때 귀찮아서 바로 욕실로 들어가 온수 속에서 잠들었다. 일요일 내내 K는 잔소리로 내 기분을 상처 냈다. 일요일 오후 광주로 내려가는 K의 얼굴이 뾰로통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K와도 끝내야하나? 태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이별이 언뜻 떠올랐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출판사 업무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스페니쉬 수업 세 번째 목요일, 어학원 계단을 오르며 ‘오늘은 나를 어떻게 대할까?’하는 떨림과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오늘 밤 어때? 그녀의 말이 와인바를 울리기 전에, 와인 첫 잔을 마시며 나는 능청스러워지고 싶었다. 세 번째 만나는 학원생으로서의 생소함과 12년 전 전처로서의 어색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고 싶었다. 생소함에 대한 흥분은 사라졌다. 하지만 붕 뜬 불안이 세 번째 만남의 생소함을 필요로 했다. 능청스러워지기 위한 마음가짐이 생소함이었다. 생소함에는 테스토스테론에 의한 흥분이 따른다. 예전 능청스러웠던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는 파리한 그녀에게 마냥 능청스러웠고 음흉했었다. 지금 그녀는 파리하지도 않고 처량하지 않다.

 

예전 기억은 자괴감만 생겨난다. 억지로 그녀와의 신혼 첫날밤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만은 처녀라는 생소함에서 온 테스토스테론 흥분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첫날의 고통이었지만 뻔뻔한 나에게는 나름대로 생소함이 있었다. 우리 한때 매우 뜨거웠고 사랑 넘치는 밤을 보낸 적이 있었어. 아, 세월이 많이 흘렀어. 자괴감과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말을 만들었다. 와인에 취한 척 두서없이 말을 뱉어냈다. 오늘 밤 어때? 숨 쉴 틈도 없이 바로 그녀가 말했다.

 

은근히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웃음이다. 신청한 ‘Without You’가 와인바 안에 퍼졌다. 그녀가 와인을 편하게 마시며 말한다. 신혼 때 네가 자주 들려주던 팝이지. 기억에 없다. 당황스럽다. 그 때는 이 노래가 나를 설레게 했는데 오늘은 마음을 편하게 하네. 고마워. 또 나를 놀라게 하는 말이다.

 

소믈리에가 가끔 우리 대화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다. 폰이 울리고 바탕화면에 K의 이니셜이 뜬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그녀가 받아보라는 눈짓을 한다. 잠시 바깥에 나가 전화를 받고 오자 서슴없이 괜찮아? 혹시 아내가 걱정하는 것 아냐? 당당하게 말을 한다. 당황스럽다. 괜찮아. 재혼 안 했어. 그냥 가끔 만나는 사람이야. 갈증을 심하게 느끼며 연거푸 와인을 마신다. 핑 도는 머릿속에서 그녀는 돌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녀는 시간을 요리하듯 목요일 밤을 맛나게 만들고 있다. 그녀 식성대로 시간을 요리한다. 그녀가 맛나게 만드는 시간 따라 나는 목요일 밤을 맛나게 먹기만 하면 된다. 합정동 밤이 그녀의 손길 따라 다듬어지고 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거리의 불빛들이 폭죽처럼 합정동 밤하늘로 밤새 터진다. 합정동 밤거리가 무섭다. 아니 흥분된다. 합정동 밤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그녀 손길에 밤이 황홀하게 만들어진다.

 

그녀는 예전 병든 길고양이가 아니다. 아스팔트 한구석에서 아파서 벌벌 떨면서 애처롭게 웅크리고 있던 모습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제는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세워서 도도하게 꼬리를 치며 걸어 다니는 친칠라 페르시안 고양이가 됐다. 그녀의 변신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예전 병든 길고양이였을 때 마냥 슬픈 눈동자로 내 손길을 기다렸다.

 

지금은 범접할 수 없는 자태로 나를 놀이감으로 여긴다. 당당하게 내 가슴위에 올라와서 뜨겁게 쓰다듬는다. 헉헉거리는 내 숨결을 조롱하듯 깊게 들숨날숨을 쉬면서 몸의 시간을 맛나게 요리한다. 그녀가 다루는 몸의 시간은 격렬하고 달콤하다. 밤을 뜨겁게 달군다. 밤의 기온이 한없이 치솟는다. 나는 마냥 그녀의 손길 따라 휘청거릴 뿐이다. 놀라움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지도 않다. 혀 깊숙이 나를 천천히 때로는 재빠르게 음미하며 그녀 속으로 집어삼킨다. 나와 목요일밤을 맛나게 핥아 먹은 후 배부른 포만감으로 깔끔하게 나에게서 떨어진다. 얼떨떨한 시간동안 샤워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샤워가 끝나자 그녀는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합정동 밤하늘을 음미한다.

 

커피 한 잔 준비했어. 그녀는 행복하게 말한다. 예전의 어색함과 지금의 생소함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새롭게 지금의 친밀함이 생겨난다. 묘하게 생긴 친밀감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도도하고 당당한 모습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경계심을 갖게 한다. 다가가면 확 할퀼 것 같다. 눈은 푸르게 반짝인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깊다. 풀 수 없는 의문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를 편하게 하는 눈길이다.

 

대학교는 벌써 관두고 출판사도 잘 안 된다면서? 알고 있으면서 왜 물었지? 당신을 편하게 하려고. 출판사는 그녀의 저금통장에서 몰래 축내서 만든 나의 음모였다. 처음 그녀를 만날 때부터 그녀가 내 음모를 알았어도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음모의 희생자로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30대 청년의 삶은 너절하고 비참하며 답답하게 이어질 것 같았다. 꽉 막힌 젊은 삶을 뻥 뚫고 날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쉽게 나의 눈에 들어온 희생물이었다. 이혼 후 그녀는 나의 음모를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묵묵히 있기만 했던 그녀였다. 결혼 3여 년 동안 의도적으로 피임했다며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그때야 고개를 끄덕이며 흐느꼈다. 손을 떨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출판사는 적자투성이야. 미안하다. 너 몰래 네 돈으로 차린 출판사인데…. 이 모양이 됐네. 변명처럼 너절하게 더듬으며 얘기한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기만 한다. 창밖 가로등이 희미하게 식어간다. 속죄양처럼 그녀 앞에 있기에는 비참하다. 며칠 전부터 불면증을 일으킨 의문을 더듬거리며 물어본다. 나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고마웠다니? 그녀 깔깔거리며 환하게 웃으며.


나라는 흰 캔버스에 그림이 아름답게 그려지길 바랐다. 누군가가 그려줄까? 소녀 때부터 수줍게 기다렸다. 어떻게 아름답게 그려줄까? 첫 달거리부터 설렘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려 내 캔버스 앞에 나타났을 때, 아랫도리에서 달거리가 새빨간 장미처럼 활짝 피어났다. 누군가에게 내 맘 속 반짝이는 첫 별을 아낌없이 줬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다. 아니, 그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멋대로 캔버스에 엉망진창 낙서만 잔뜩 했다.

 

누군가는 엉망으로 그려놓고 히히거리며 떠났다. 오랜 시간 캔버스는 찢어지고 누렇게 변색돼 바람 따라 처량하게 나부꼈다. 세월 따라 나부끼던 캔버스 앞에 한 마리의 애완견 그리고 두 명의 새로운 누군가가 차례로 나타났다. 차례로 찢어진 캔버스를 풀로 붙이고서, 엉망진창 낙서를 서로 도우며 그림으로 변화시켰다. 사랑이 가득한 손길로 낙서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들었다. 기적 같은 그림이 완성됐을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행복하게 울었다.

 

처음엔 지우의 재롱이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고 성가셨다. 하지만 며칠간 서로 티격거리다보니 정들기 시작했다. 내 곁에 와서 나를 보며 짖어댈 때, 꼬리를 내 몸에 살랑거렸을 때 공원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지우에게 던졌다. 내 곁에 오지 말라고.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오전나절 아파트 공원은 텅 비었다.

 

이혼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이혼이란 상처는 아팠다.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순진했던 스스로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3여 년 남편 웃음은 다정했고, 진실 되게 말을 했다. 갑작스런 이혼은 30여 년 믿어왔던 삶을 뒤흔들었다. 잘못 살아왔나? 잠 못 이루는 밤이 괴로웠다. 오전나절 약국 바로 옆 공원에서 남몰래 쉬곤 했다. 나무로 가려진 벤치에 멍하게 앉아 있곤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우가 거의 매일 나에게 쫄랑거리며 다가왔다. 짖어댔고, 꼬리를 살랑거렸으며, 내 발등을 핥기도 했다. 애완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유기견이었다. 며칠 째 티격거리다 보니, 뒤를 쫓아 약국까지 따라왔다.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뒀다. 혼자서 약국을 들락날락거리며 내 곁에 서성거렸다. 초여름 비에 흠뻑 젖은 지우가 급히 약국으로 들어와서 바닥에 쓰러지며 나를 쳐다봤다. 눈 속 깊이 외로움이 서려있었다.

 

짖기조차 못한 채 할딱거리며 아픔으로 빠져들었다. 듬성듬성 털 빠진 몸뚱이는 애처로웠다. 지우 눈 속에서, 몸뚱이에서 나를 봤다. 그날부터 나와 지우의 동거가 시작됐다. 나의 아파트는 자우의 재롱으로 가득 찼다. 내 품속에 안겨 자는 지우에게서 온기를 느꼈다. 냉랭하던 아파트에도 온기로 가득 찼다. 하루하루 우리의 사랑은 깊어갔다. 지우는 나보다 훨씬 늙은 언니였다. 언니처럼 나를 다독거려줬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지면서, 나에 대한 실망도, 남편에 대한 원망도, 이혼에 대한 절망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지우는 내가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걸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침햇살 받으며 지우와 아파트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즐거움이 됐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아침햇살은 나뭇잎이나 풀잎 그리고 꽃들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했다. 지우는 나뭇잎이나 풀잎, 꽃들에 내려앉은 아침햇살을 멍멍 짖으며 껴안았다.

 

누군가가 빼앗아간 저금통장이나 이혼도장도 잊혀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누군가의 음흉한 눈길도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아침햇살이 나에게 멜라토닌을 뿌렸다. 아침햇살 속 지우의 재롱은 내 몸에 옥시토신으로 가득 채웠다. 지우의 재롱 따라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남편과 있을 때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지우와의 아침산책은 단순했다. 아니 오히려 단순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지우의 재롱은 아침햇살 따라 꽃들의 색깔처럼 달라졌다. 매일 달라지는 재롱이 재미있었다. 지우와 동거한 2여 년이 지나면서 지우는 산책하기 힘들 정도로 늙어갔다. 걱정은 엄청나게 커져갔다. 이즈음 하준을 만났다. 대학동기회장의 성가신 전화 때문에 모처럼 동기회에 참석했다. 여러 동기들이 반갑다고 인사했다. 그런데 하준이가 가장 많이 반가움을 표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면서,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그냥 인사말로만 흘려버렸다. 함께 귀가하다보니 같은 아파트 단지의 이웃사촌이었다. 출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얼굴이 어둡네, 왜? 지우가 늙어서 오래 못살 것 같아. 하준은 내 어깨를 힘껏 감쌌다. 함께 보살펴주자. 친구로서 우정이 넘쳤다.

 

걱정이 크기에, 친구의 정이 좋았다. 하준은 틈나는 대로 나대신 동물병원을 가거나 내 아파트에서 지우를 보살폈다. 우리는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지우는 하준을 나와 같이 어울려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움직이지 못하지만 하준에게 재롱을 부렸다. 나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 셋은 합체돼야하는 생명체로 변신했다. 거의 매일 하준이가 지우를 안고서 셋이 아침산책을 했다. 걸을 수는 없었지만 지우는 아침햇살에 고개를 흔들며 재롱부리곤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늙음에 지우는 전혀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나와 하준의 얼굴을 혀로 핥으며 즐거워서 쌕쌕거렸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괜한 걱정을 하지 말라면서. 나와 하준의 정성어린 보살핌도 냉정한 시간 속에서 소용없었다.

 

어느 5월. 햇살 담은 바람이 드높은 하늘에서 살랑살랑 불 때. 이 세상 모든 것에 햇살이 생생하게 비추며 온갖 색깔로 새롭게 단장할 때. 아침이나 저녁노을이 기이롭고 감탄스러울 때. 이 세상 모든 것이 햇빛과 바람 안에서 움틀거리며 생명을 만들어낼 때. 지우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햇빛과 바람 속으로 사라져갔다. 몸이 먼지처럼 미세하게 부서지며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눈물 속에서 사라지는 지우가 보였다. 손발부터 부서지며 흩어졌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우리를 보며 행복하게 웃음 지었다.

 

나에게 잔잔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어. 햇빛과 바람 속으로 사라지면서 남긴 마지막 인사였다. 아무리 허우적거리며 지우를 잡으려 해도 바람과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고맙다는 마지막 기적의 말을 따뜻하게 남긴 채.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하지만 통곡하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가슴에서 눈물로 느꼈다. 눈물은 눈이 부시게 햇빛을 담았다. 하준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서로 손을 꼭 잡고 사라지는 지우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도 고마웠다고. 사라졌지만 고마웠다. 지우를 품은 햇빛과 바람이 내 얼굴을 간질거렸다. 내 얼굴을 핥는 지우가 느껴졌다. 지우는 사라지지 않았다. 햇빛과 바람에 묻혀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지우를 바람과 햇빛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재롱부리며 나를 즐겁게 하는 지우를 볼 수 있다.

 

지우가 떠난 빈자리를 하준이가 메워줬다. 그는 거의 매일 약국에 들렀다. 지우 대신 그와의 저녁산책이 시작됐다. 산책 중에 그는 엉뚱한 말들을 했다. 내가 왜 유학을 떠났는지 알아? 생각지 않은 질문이었다. 몰라. 무심한 채 대답하면, 네가 결혼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서. 깜짝 놀랄 대답을 했다. 내가 왜 아직 결혼 안한 지 알아? 엉뚱한 질문을 했다.

 

몰라. 의아한 듯 대답하면, 너를 아직 못 잊은 모양이야. 가슴 뛰는 대답을 했다. 지우와 함께 했던 우정이 산책 중에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우정은 아니었다. 지우에게서 함께 고맙다는 작별인사를 들은 사랑이었다. 또한 젊은 날에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나에 대해 짝사랑이 그의 애절한 눈 속에서 보였다. 나를 짝사랑한 남자가 있었구나. 나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나는 이혼한 여자야. 그에게는 하찮은 문제였다. 고민거리가 될 수 없었다.

 

지우가 햇빛과 바람 속으로 사라진 1년 후. 봄 햇살 속에서 지우에 대한 추모를 하면서 하준이와 새 가정을 시작했다. 그때 전 남편에게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다. 지우대신 내 곁에서 하준이가 재롱을 떨었다. 밤낮 구별 없이 하준이는 재롱과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난임의 시간은 2~3년 계속됐다. 산부인과 선배의사의 알뜰한 치료나 조언도 소용없었다. 가정을 다시 가진지 4년째, 또 다른 내가 자궁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또 다른 호흡과 맥박소리를 들으며, 기쁨이 온몸에서 넘쳤다. 딸이네요. 의사의 흥분된 목소리에 우리 부부는 마냥 울었다. 저절로 기쁨은 눈물이 됐다. 출산한 딸아이는 지우를 닮았고, 나와 하준이를 닮았다. 햇빛과 바람 속에서 딸아이는 마냥 싱그럽게 웃었다. 딸아이 이름을 지우라고 지었다.

 

딸아이 돌잔치 때, 뜻밖에 막내외삼촌이 소식을 듣고 참석을 했다. 매우 반가웠다. 외항선을 탄다고 거의 몇 년에 한 번씩 볼 수 있었던 막내외삼촌이었다. 외삼촌도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었다. 듬성듬성 난 백발에서 세월이 보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릴 적 큰오빠처럼 나를 다정스럽게 보살펴줬다. 외삼촌이 외할아버지 소식을 전해줬다. 외할아버지가 양평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돌잔치의 기쁨보다 무심했던 자신에게 자책하며 슬픔이 울컥 솟구쳤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에 잠시 화장실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시절은 외할아버지와의 아기자기한 생활이었다. 지방에 발령 받아 근무해야했던 엄마대신 외할아버지가 엄마노릇을 했다.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 노릇을 내가 한 듯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부모와 함께 서울에 살면서 큰외삼촌 따라 부산으로 내려간 외할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지우를 재운 후, 남편 품안에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에 실컷 눈물을 흘렸다.

 

주말에 남편과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예전 풍채 좋았던 외할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한 채 가냘프게 침대에 누워 어눌한 말투로 찾아와서 고맙다고 띄엄띄엄 말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외할아버지는 사라져가고 있다. 주말마다 병문안을 갔다. 외할아버지는 사랑 가득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어릴 적 나를 얘기했다. 기억을 세세히 했다. 행복하게 얘기했다. 귀엽고 예쁘며 똑똑했지. 더듬거리는 말에는 사랑이 넘쳤다. 매우 잘 자라줬다며 기뻐했다.

 

가을바람과 햇살이 가득 뿌려진 9월 마지막 수요일에 외할아버지는 사라졌다. 가을바람은 청량했고, 햇살은 해맑았다. 사라지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따스한 눈길로 자주 와서 고마웠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은 냉정했다. 냉정한 시간 속에서 외할아버지는 묻혔다. 청량한 가을바람과 해맑은 햇살 속으로 외할아버지는 행복하게 사라졌다. 지우언니와 외할아버지는 햇살과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려줬다. 그들은 시간이 냉정하지만 고맙다며 행복하게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햇살과 바람을 눈물 속에 담았다. 가슴 깊이 기억될 수 있게.

 

2년 전이었다. 시간의 잔인함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뜻밖의 사라짐이었다. 하준이의 교통사고가 있기 전까지 다듬어지는 나이 따라 가정은 따뜻했다. 바람과 햇살에 사라지는 것을 평안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햇빛과 바람 속에도 잔인하게 사라지는 것이 있었다. 천둥번개 치는 여름밤, 하준이가 사라졌다. 빗길 교통사고로 하준이가 사라졌다. 가슴은 울분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온몸은 산산조각 찢어지는 듯했다. 대구 여름학회에 참석 후 귀경하는 경부고속도로에서의 빗길 교통사고였다.

 

마지막 통화에서 자고 오라는 내 부탁을 보고 싶다는 웃음 섞인 대답으로 거절했다. 급하게 지우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을 때 하준이는 의식불명이었다. 이미 천둥번개 치는 여름 폭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돌풍이 남편 곁으로 휘몰아쳤다. 식어가는 남편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심장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식어버린 몸은 내 온기로도 도저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지우가 아빠라고 울부짖는 소리만 응급실을 가득 채웠다. 시간은 잔혹하게 멈추지 않았다. 지우와 나의 통곡도 천둥번개 소리보다 더 작았다. 남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 작별인사가 떨리면서 희미하게 들렸다. 고마웠다고. 지우와 행복했다고. 입가에 잔잔하게 웃음이 번졌다. 남편이 웃으며 말하자, 눈물로 울렁거리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마지막 웃음을 같이 나눴다.

 

그녀가 창문을 활짝 연다. 바람이 방으로 불어온다. 호텔 룸이 바람으로 가득 찬다. 10월 밤바람이 상쾌하고 달콤하다. 그녀는 눈을 사르르 감고 바람 속으로 빠진다. 얼마나 밤바람이 사랑스럽니? 너도 느껴지니? 바람 속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라졌지. 언제나 나를 감싸며 함께 지내지. 그들과 함께 언제나 편하게 커피도 마시고, 춤도 추고, 꼬옥 껴안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지. 그녀는 바람과 함께 춤추며, 커피를 마신다. 너는 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니? 그가 당황스럽게 커피잔을 들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오늘 합정동 목요일 가을밤이 어때? 바람이 사랑스럽게 불잖아. 바람 속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도 화사하게 흩날리고 싶거든. 너도 바람 속 사람들처럼 여겨졌어. 왠지 예전 사랑했던 마음이 기억되면서.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언제나 편할 수 있을 것 같아. 새 저금통장을 갖고 있고, 집도 가지고 있어. 넌 지금 또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니? 나는 개의치 않아. 시간들은 너무 잔인하니까. 어쩔 수 없어. 너도 나도 언젠간 바람 속으로 사라질 거니까. 그가 조각상처럼 우뚝 선 채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무섭다.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그를 툭 건드린다. 그가 바람에 쓰러진다. 그는 바람을 느낄 수 없다. 그녀가 쓰러진 그에게 웃으며 작별의 말을 한다. 다음주 목요일에도 언제나 편하게 만나자.

 

소설가 허택

- 2008년 문학사상 신인상 “리브 앤 다이“로 등단

- 작품집 '리브 앤 다이'(2011), '몸의 소리들'(2014), '대사증후군'(2017) 발표

- 현재 부산소설가협회 이사, 부산문화재단 비상임이사

- 평화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