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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전의 선물

스펙트럼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3년 1월 추운 어느 겨울날, 이제 본격적으로 고3이 되어서 입시 준비를 시작하느라 모교 고등학교 도서관에 친구들과 자리하고 있었다(그 당시는 사교육 금지 시기라서 학원이나 개인과외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방학 때에도 점심, 저녁 도시락을 2개씩 준비해서 학교 도서관에 아침 일찍 등교하듯이 가서 하루 종일 있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기였음).

 

그날도 평소의 다른 날과 다름없이 점심 도시락을 까먹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버텨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친구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생일 축하해” 하면서 포장된 자그마하고 네모 반듯한 박스선물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의아해 하면서도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열어보니 만년필! 그 당시에는 꽤 귀한 물건이었다. 친구 둘이서 푼돈을 오래 조금씩 모아서 마련한 돈으로 본인들의 이름 중 한 글자씩을 사용해서 ‘축 생일 충.기’라고 새겨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고맙고 소중해서 아끼느라 차마 사용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책상 서랍 속에 곱게 모셔두고 이따금 꺼내서 만져보며 눈으로 감상만 하면서 간직했다. 그러기를 한 해 한 해 지나간 것이 어언 30년도 7년이 넘은 어느 날,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오랜만에 눈에 보인 그 만년필을 손으로 만져보니 그 옛날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그 선물로 글씨를 한 번 써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었다.

 

그 만년필은 요즘처럼 카트리지 잉크를 끼어서 쓰는 타입이 아니고 펌프식으로 잉크를 빨아들여서 사용하는 방식이라 잉크를 담을 고무 튜브가 삭았을지도 모르는 터라 괜히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잉크로 뒤범벅이 된 상태가 되어 마음만 상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되었지만 구입한 잉크가 배송되어 온 날 용기를 내어, 펜촉을 잉크 속에 담그고 만년필 뒤의 흡입용 고무펌프 부분을 눌러서 잉크를 빨아드린 후 종이에 대고 쓰기를 시도해보는데 사각거리면서 하얀 종이 위에 글씨가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수십 년 만에 기능하는 그 만년필의 펜촉이 움직일 때 종이에 닿으며 손에 느껴지는 그 미세한 진동의 느낌이란!


이제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만년필을 가지고 환자 보호자 분에게 상담 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려가면서 그분의 귀한 아이의 검진 내용과 치료계획을 설명할 때 의미 있게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친구들이 전해준 사랑의 선물을 눈으로, 손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말이다.

 

요즈음 전 세계 어디서나 누구든지 피할 수 없고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내게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친구들이 37년 전에 선물해준 낡은 만년필로 새로운 글씨를 창조하면서 써가는 맛에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충분히 행복감에 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