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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많은 것을 덮어준다

시론

남편은 환갑이 넘어서 자기 딸들 보다 어린 여비서와 바람을 피다가 아내에게 이혼 당한다. 엄격한 가톨릭의 본고장 출신이기에 이혼은 그 동안 쌓아온 그의 명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남편은 알고 보니 꽤 바람둥이였다. 아내는 남들의 불편한 시선과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전남편을 회상하며 그녀는 말한다. “시간이 많은 것을 덮어주더군요.” 그렇게 그를 용서하며 따뜻하게 감싸준다. 올해 초 개봉한 론 하워드 감독의 Pavarotti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의 음악, 인간미, 인생과 음악에 관련된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나온다. 비평은 잠시 제쳐 두고,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는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다갔다. 본처에게도 나중에 용서 받았고, 딸들에게도 용서 받았고, 그의 많은 연인들 중의 몇몇도 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을 잘 믿었다.   


A 원장은 연고지가 아닌 곳에 개원하여 몇 년이 지나 자리도 어느 정도 잡히고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B 씨는 A 원장 치과의 근관치료환자였고, B 씨의 어머니는 임플란트, 딸은 교정환자였다. A 원장은 B 씨를 치료 하던 중 상악 1대구치 근심협측근관 근첨에서 파일 분리(file separation)가 일어났다. 그것에 대해 B 씨는 수 천만 원을 보상하라며 A 원장에게 막무가내로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A 원장은 부당한 것 같아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더니 고소를 당하였고, 2년 가까이 B 씨와 송사를 치르게 되었다. 기다림 끝에 B 씨가 제기한 업무상 과실 치상에 대해서 증거 불충분으로 A 원장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당 치아는 보존되어 저작기능을 잘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 분들의 도움과 신앙으로 의사생활 최대의 위기를 잘 넘긴 A 원장은 그 와중에 B 씨의 딸이 계속 교정 치료 받기를 원하여 마무리까지 하였다.


나의 사례가 몇 해 전 치의신보 1면에 두 번 익명으로 소개 되었다. 기사를 보고 신문사에 나를 수소문하여 서울의 모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파일분리로 환자가 무리한 보상액을 요구하며 힘들게 하고 있다고.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감해주고 용기를 주는 것 뿐 이었다. 그 느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 당시 서울시 법제이사와 연락이 닿아 이 건에 대해 상의 드렸더니 서울지부에서 의료중재원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 지부에서도 유사사례가 있었는데 파일분리로 환자가 원장을 고소하였으나 나의 판례가 참고 되어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회무도 잘 못하는데 내가 우리지부에서 법제이사를 하고 있다. 우리지부는 회원들의 고충을 익명으로 접수하고 도움을 주려고 고충처리위원회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 고충사례들을 모아 백서를 지부 소식지에 정기적으로 올려서 회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법제이사를 하다 보니 회원들의 고충사례를 가까이서 많이 접하게 된다. 원만하게 잘 해결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안타까웠다. 분쟁 중에는 가끔씩 전화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묻기도 했고, 커피를 사들고 고충 치과로 찾아가기도 했다.


지방 중소도시의 평범한 개원의인 나에게 시론 의뢰가 왔을 때 나는 필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지혜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고민했다. 수락을 고민하던 중에 문뜩 그 분이 떠올랐다. 나를 성숙하도록 값진 계기를 만들어주신 B 씨. 그 일을 겪을 때 처음에는 내 마음이 억울함과 미움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용서로 채워졌고 나중에는 측은지심이 들었다. 결국에는 그 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시간은 많은 것을 덮어주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라는 대목이 있다. 내가 신에게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줘야한다. 결국, 용서는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나의 내면에 평화가 깃든다. 영화의 인터뷰 속에서 파바로티 아내의 넉넉한 표정과 전 남편에 대한 따뜻한 덕담은 그녀 내면의 평화에서 나온 것이리라. 시간이 그녀에게 용서의 마음을 주었다. 요즘 코로나로 모두 힘들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앵그리 등등 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신조어도 등장했다. 환경이 힘들어지니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점점 없어진다. 인내심도 줄어드니 쉽게 마음이 상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위하여 용서의 마음이 늘 필요하다. 잘 안되더라도 시간이 결국 도와준다. 나도 시간에게 감사하다. 끝으로 평범한 개원의에게 계속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는 치의신보에게도 감사하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